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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라.

박종각 2018. 6. 17. 02:09

                 내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라. 

                    욥6:1-30절 말씀입니다.


[1그러나 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2 “오, 내 슬픔을 전부 달아보고 내 재앙을 다 저울에 놓아 보았으면! 3지금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도 더 무거우므로 내 말들이 삼켜졌느니라.4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내 안에 있으며 내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공포가 나를 치려고 진열하도다.5 들나귀가 풀이 있는데 울겠느냐? 또한 소가 꼴 위에서 울겠느냐? 6소금 없이 싱거운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 또한 달걀의 흰자위가 무슨 맛이 있겠느냐? 7 내 혼이 만지기를  싫어하는 것들은 마치 내 슬픈 음식 같도다. 8오 내가 구하는 것을 갖는다면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 9나를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면 그것마저 바라리라. 그가 그의 손을 풀어 나를 끊으시기를! 10그러면 내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정녕 슬픔 가운데서도 마음을 모질게  먹으리니  그분께서 사정없이  그리하시기를 바라노라. 이는 내가 거룩하신 분의 말씀들을 숨기지 아니하였음이라. 11내 기력이 어떠하다고 내가 소망을 가지겠느냐? 내 끝이 어떠하다고 내가 내 생명을 연장하겠느냐? 12 내 힘이 바위의 힘이겠느냐?아니면 내 육신이 놋쇠의 육신이겠느냐? 13내 도움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냐? 지혜가 내게서 아주 쫓겨갔느냐?14고난받는 자에게는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이 베풀어져야  하나 그 친구는 전능하신 분의 두려움을 저버리는도다. 15내 형제들은 시내처럼 속임수로  행하고  시냇물의 흐름처럼 지나가나니 16 시내들은 얼음으로 인하여 검어지고 그 속에는 눈이 감추어져 있도다.17 그 물이 따뜻해질 때 시내들은 사라지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 자리에서 소진되는도다.  18 그 물이 흘러가는 길들은 잘못 간 길이라, 아무데도 이르지 못하고 끊어지는도다. 19테마의 군대들이  바라보고 시바의 무리들도 그들을 기다렸도다. 20그들이 바랐으므로 당황하였으며 그들은 거기에 가서 수치를 당하였도다. 21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 너희가 나의 낙담을 보고  무서워하는도다. 22  내가 언제 내게 무엇을 가져오라 말하더냐? 아니면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보상하라 하더냐? 23  아니면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 하더냐? 아니면 힘센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해 달라 하더냐?   24 나를 가르치라. 그리하면 입을 다물겠노라. 또한 내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라.  25 옳은 말들은 얼마나 힘이 있느냐! 그러나 너희 주장은 무엇을 책망하는 것이냐? 26 절망한 자가 말하는 것은 바람 같은 것인데 너희는 그 말을 책망하려고 하느냐? 27정녕, 너희는 아비 없는 자를 압박하고  너희 친구를 위하여 구덩이를 파는도다. 28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만족하면 나를 쳐다보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너희에게 분명히 드러나리라. 29내가 원하노니 너희는 돌이켜서 죄악이 없게 하라.  정녕,  너희는 다시 돌이키라. 내 의가 그 안에 있느니라. 30내 혀에 죄악이 있느냐? 내 미각이 어찌 변질된 것들을 분별할 수 없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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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그렇다고 해서 엘리파스의 말이, 극한 상황에 처한 욥에게 위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1절에서 [내 슬픔을 전부 달아보고...] 라고 말합니다. 사실 엘리파스는 욥이 당한 슬픔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욥의 [고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욥5:8절에서 [나는 하나님께 구하고 나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고난이 다가오자 욥은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O 그러나 그 말은 억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했으며, 주께 감사하고 찬양했으며 주께 예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욥에게 엘리파스의 교훈은 마치 어린 아이 말과 같아서 욥은 그런 엘리파스의 말에 대응할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내 슬픔을 전부 달아보고]라는 말로, 그의 말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4절에서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내 안에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O 그래서 1-4절의 말을 요약하면, [내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 것을, 네가 알았다면, 만약 나의 슬픔의 무게들과, 나에게 임한 재앙들의 무게들을 저울에 달아 볼 수 있다면, 그것들이 너무  무거워서 무겁다는 말조차도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서령 내게 임한 내 슬픔과 재앙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입을 연다할지라도 너는 내 말에 동의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너는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나를 표적으로 삼으셔서 화살 쏘는  연습을  하시는데,  그분의 화살에는 독이 묻어 있으며, 주께서는 나를 마치 적군처럼 대하시면서 나를 치시기  위해서  지금 나를 에워싸시고 계시다] 는 말입니다.


O 5-6절에 보면[들 나귀가 풀이 있는데 울겠느냐? 또한 소가 꼴 위에서 울겠느냐? 소금 없이 싱거운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 또한 달걀의 흰자위가 무슨 맛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욥은 지금 자기 옆에 앉아서 쓸데없는 말만 해대는 엘리파스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합니다. 1)[들 나귀가 먹을  것이 있는데 시끄럽게 울겠는가?] 먹이가 있는 들 나귀는 울지 않습니다.   2)[소가 꼴  위에서 울겠는가?] 좋은 꼴 위에 있는 소는 울지 않습니다. 3) [소금 없이 싱거운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 먹을 수 없습니다. 4) [달걀의 흰자위가 맛이 있겠는가?] 흰자위는 아무 맛도 없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욥은 [내 혼이 만지기를 싫어하는 것들은 마치 내 슬픈 음식 같다.]고 말합니다. [혼]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육신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구약에서 혼은 육체에 붙어 있어 마치 혼과  육체가  하나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내가 형통할 때에는, 내게 유익한 것들이 내 곁에 있었지만,  그러나 내가 재앙 아래 있게 되자, 나는 내 혼이 싫어하는 슬픔과, 고통과, 고난과, 외로움 같은 것들을 매일 음식으로 먹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O 8절에 [오 내가 구하는 것을 갖는다면,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네 가지 것에 대해 질문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욥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늘을 향해 들고서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이라고 부르짖기를 시작합니다. 사실, 인간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동안,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 이뤄지기를 얼마나 외쳐 댔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 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O 그렇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에게서, 처절한 삶의 고통의  현장에서, 사업장에서, 병원에서, 침몰하는 배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오늘도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 이라고  부르짖는 이 소리로 이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외침만 있을 뿐, 이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취되지 않은 여러 가지의 형태의 소망을, 인간들의 마음속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인식시켜 주시기 위해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인간들의 마음속에 두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인 이 세상이라고 하는 이생은,  결코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고, 인간들이 그토록 소망하면서 바라는 그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며, 모두 허무한 것들이고, 헛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O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진정으로 알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런 대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 외에는 어떤 길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근본 문제의 해답은 바로 만군의 주 하나님을 찾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인간들의 마음속에 두신 것입니다.그래서 진정한 [실제]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영원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O 욥은, [내가 구하는 것을 갖는다면]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사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가 질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우리가 구한 것들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해 주시지  않다고  해서 순수하게 그것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날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당신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살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가 결국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9절에 [나를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면 그것마저 바라리라. 그가 그의 손을 풀어 나를 끊으시기를!]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지금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그토록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욥3:20-21절에 보면,  욥은  [어찌하여 불행에 처한 자에게 빛을 주시며 혼이 쓰라린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고. 이런 자는 죽음을 바라나 오지 아니하므로 숨겨진 보배를 찾는 것보다 죽음을 찾아 더 파나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욥이 그토록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8절에서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 이라고 외치면서. 다시 9절에서는,  [그의 손을 풀어 나를  끊으시기를]이라고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죽기를 갈망할 때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욥의 요구를 무시해 버리시고 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도,(출32:32) 요나도 (욘4:9)  엘리야의 부르짖음도 (왕상19:4)모두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O욥은 9절에서 [나를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면 나는 그것마저도 기쁘게 받아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하시기로 작정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욥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그를  멸망시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의 생각하고는 반대의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욥을 통해서 그의 후손대대로 인내의 본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결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루아침에 욥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루아침에 욥의 모든 것을 다시  복구 시키실 수 있는 분도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욥은 지금 그런 것들을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손을 푸셔서 자신에게 닥쳐온 이 비극의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 달라고 간구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오늘날 안락사에 대한 문제로 종종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명분으로도 어느 누구도 안락사를 시킬 수 없습니다. 안락사는 그냥 살인 행위입니다. 안락사는 사형제도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형제도는  엄격한 나라의 법에 따라 이뤄지는 것입니다.


O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 허비하지 말고, 그보다는 한 사람의 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은, 단지 육신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육신의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혼에 있는  것입니다.



O 그래서 주님은 마10:28절에 [너희는 몸은 죽일 수 있으나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차라리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오판으로 인하여 무죄한 자가 억울하게 죽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형제도는 엄격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인정하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는 이상, 어떤 누구도 그를 안락사를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동방의 제일가는 부자가 하루아침에 다시 제기 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망하고,  하루 아침에 열 명의 자녀들이 죽고, 아내는 자신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며 자신에게서 돌아서고, 그리고 자신은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악한 질병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그 고통 중에서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살을래야 살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죽음만을 원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 그의 손을 풀어 나를 끊으시기를]이라고 울부짖는 욥을 보면, 그를 안락사 시키는 것보다 그에게 더 좋은 자비는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욥의 부르짖는 그 소리를 듣고 욥의 친구 중, 어느 누구도 욥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욥이 지금 이렇게 부르짖는다고 해서 자신이 욥과 같이 잿더미 위에서  욥과 같은 형편과 욥과 같은 [병든 몸을 입고]있어 보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지금 부르짖는 욥을 향해  비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O 10절에 [그러면 내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정녕 슬픔 가운데서도 마음을 모질게 먹으리니 그분께서 사정없이 그리하시기를 바라노라. 이는 내가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숨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욥은[내가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숨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급한 [주님의 경고]들을 그들의 교회에서 그들의 강단에서 감촉같이  숨겨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도, 주님의 경고도, 주님의 계시도, 주님의 예언도 성도들의 휴거도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도 숨기고는, 매 시간마다 자기들의 혓바닥 돌아가는 대로 쓸데없는 말만 짓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알았고, 그의 친구들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욥22:22절에 [내가 원하노니 너는 그분의 입에서 율법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말씀 하십니다. 또, 욥33:14절에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시고 두번 말씀하셔도 사람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도다]고 말씀 하십니다. 엘리파스는 욥이 탄식하기  바로 이전 장에

서 이런 메신저 중, 하나를 맞아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욥4:16-17절에서 [그 영이 가만히 섰으나 나로서는 그 형태를 분별할 수가 없었으며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는데  조용하였고 내가 한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죽을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자기의  창조주보다

더 순결하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 이전의  구약 시대에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셔서 말씀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O 이처럼 욥은 당시 재판관으로 일하면서(욥29:7-23)기도와 계시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하나도 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래서 욥은 욥23:12절에서[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의 말씀을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도다.]라고 말합니다.


O 그리고 11-13절에 [내 기력이 어떠하다고 내가 소망을 가지겠느냐?  내 끝이  어떠하다고 내가 내 생명을 연장하겠느냐? 내 힘이 바위의 힘이겠느냐? 아니면 내 육신이 놋쇠의 육신이겠느냐? 내 도움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냐? 지혜가 내게서 아주 쫓겨 갔느냐?] 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힘이 다 사라졌는데 내가 무엇을 바랄 수 있겠으며 그 끝이 바르게 드러날 수 없는데, 내가 내 생명을 왜 연장해야 하는가? 너희는 내가 놋이나 쇠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나는 연약한  육체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려 하지 않으시니 내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너희들은 내가 이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지혜가 내게서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느냐?] 는  말입니다.  욥은 [내 도움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려 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도 나를 돕지 않으니 결국 내 도움은 내 자신 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14-21절에  보면 [고난 받는 자에게는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이 베풀어져야 하나 그 친구는 전능하신 분의 두려움을 저  버리는 도다.내 형제들은 시내처럼 속임수로 행하고 시냇물의 흐름처럼 지나가나니 시내들은 얼음으로 인하여 검어지고 그 속에는 눈이 감추어져 있도다. 그 물이 따뜻해질 때 시내들은 사라지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 자리에서 소진 되는 도다. 그 물이 흘러가는 길들은 잘못 간  길이라,  아무데도  이르지 못하고 끊어지는 도다. 테마의 군대들이 바라보고 시바의 무리들도 그들을 기다렸도다.  그들이  바랐으므로 당황하였으며 그들은 거기에 가서 수치를 당하였도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  너희가 나의 낙담을 보고 무서워하는 도다.] 라고 말합니다.






O 욥은 [고난 받는 자에게는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이 베풀어져야 하지만,그러나 그 친구는 전능하신 분의 두려움을 저 버리는 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에게는 반듯이 [동정을 보여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동정을 보이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전능하신 분이 얼마나 두려우신 가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을  돕기  위해서 온 그의 친구들을 마치 말라버린 시냇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에[그 물이 따뜻해질 때 시내들은 사라지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 자리에서 소진되는 도다]라고 말합니다. O  겨울에 팔레스타인 시냇물은 얼어 있다가, 나중에는 검은 색을 띤 더러운 물이 됩니다.(16절). 그리고 이 얼음이 녹으면“아무데도 이르지 못하고 곧바로 끊어집니다.(l8절).그래서 욥은 그의 친구들을 이런 얼음물에 비유하면서 그들은 누구에게도 도움도, 위로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선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힘을 돋우어 주어야 할 시내와 같은데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고, 그들은 위로하러 욥에게 왔으나, 그러나 그들은 욥이  처한  상황으로 보고 오히려 수치스러워하고 당황스러워 하며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듣기를 싫어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에 대해서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알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0 그분의 십자가를, 그분의 고통을, 그분의 아픔을 내 것으로, 내 마음 깊숙이  받아드리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눅9:23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아도 죽이고, 또 죽기까지 주 앞에서 신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처럼 결국 세상에서 미워하는 대상이 되고,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0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정말 진실 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따르지 않고세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분리주의자가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진실 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야만 평화가 이뤄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이 내놓은 어떠한 평화계획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환영받을 생각은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십자가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환영받기를  원하고,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며 세상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를 두고,  세상과 그리스도와의 중간 지점에서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발 앞으로 나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한발 뒤로 물러나 세상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은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구원하고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8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땅에는 이런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께서 죽으셨던 그 갈보리  산 주변만,  어슬렁거리면서 주님을 믿는 시늉만 하면서 일생동안 아까운 세월만  보내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O 이제 욥은, 그의 친구들을 향해서 그들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다시  그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22절에, [내가 언제 내게 무엇을 가져오라 말하더냐? 아니면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보상하라 하더냐?] 23절에[내가 너희 중 누구에게 하나님이나 사탄에게서 나를 구해 달라고 하더냐?], 26절에, [너희가 말로써 나를 바로잡으려 하느냐?] 그리고   24절에서는, [나를 가르치라 그리 하면 입을 다물겠노라 또한 내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라]고  말합니다. 욥은 정말로 알고 싶어 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주는 그들의 충고가 정말 문제의 근본을 잘 말한 것이라면 욥은 분명히 그것을 받아 드렸을 것입니다.그러나 욥의 문제는 지금 이들이 말하는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욥이 죄들을 범했기 때문에 이 재앙과 고통이 온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을 고치려고 온 세 명의 의사들은 욥의 병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욥이 [죄들을 범한 것]이 라고 욥을 오진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25절에서 [옳은 말들은 얼마나 힘이 있느냐? 그러나 너희 주장은 무엇을 책망하는 것이냐?]고 말하면서  이들의 오진을 책망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나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지른 죄인으로 주장하는 데, 이 주장은 전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 [절망한 자가 말하는  것은 바람 같은 것인데너희는 그 말을 책망하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지금 욥 자신의 말은, 마치  그저  바람과 같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인데, 그러나 너희는 그 아무 의미도 없는 내 말을 붙들고  책망하려고  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바람같이 내게서 나온 말들을 트집을  잡고서 그 말로 나를 옭아매려고]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O 사실, 사람이 절망하고 낙심하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많은 말들을 하게  마련이고, 너무 낙심하고 좌절하면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보통 때는 하지 않던 말들을 많이 하게 마련인데, 그런데 그런 말을 트집 잡고서 이렇다 저렇다 나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O 다시 27-28절에 [정녕, 너희는 아비 없는 자를 압박하고 너희 친구를  위하여  구덩이를 파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만족하면 나를 쳐다보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너희에게 분명히 드러나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욥은 [내가 거짓되이 너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거짓되이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 없는 자를 압제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다. 그러므로 너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9절에서 [내가 원하노니, 너희는 돌이켜서 죄악이 없게 하라. 정녕, 너희는 다시 돌이키라 내 의가 그 안에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욥은 [자기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욥의 죄들에게 대해서 말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은 하나님 앞에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이 없게 하라]고 욥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 토론이 근본적인 문제를 벗어나 서로 헐뜯고, 험담 일색으로 되어가서 하나님 앞에 죄악을 범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이런 식으로 너희가 나가면 결국 너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제9계명을 범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서 [죄악이 없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욥의 시대에는 [십계명]이 아직“돌판”에 새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롬2:l5절에 보면, 그 계명들은 욥의 친구들의 마음에 이미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롬2:15절에 [그들의 양심도 증거하고 그들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여  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욥은 30절에 [내 혀에 죄악이 있느냐? 내 미각이 어찌 변질된 것들을  분별할 수 없겠느냐?]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는 내가 거짓말을 한 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선

과 악에 관해서 나의 분별이 너희의 분별보다 못하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 이 말입니다.






O 그래서 욥이 6장에서 엘리파스와 그 친구들에게 한 말의 핵심은, 괜히 쓸데없는  말만 계속 늘어놓고 논쟁만 하지 말고, 문제의 근본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근본 핵심을 찾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만 만들어내는 그런 토론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결국은 다툼만 일으킬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된 날부터 인간의 혼은 결코 안개나 연기처럼 살아지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영원히 사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인간들에는 처음부터 오직 두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 길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죄와 사망과 멸망의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는 죽음의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이  길을 벗어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영원한 생명의 길인 하늘나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 두 길 앞에서, 인간들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30:19절에서 모세는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서 너희에 대하여 증거를 삼아 네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두었은즉, 그러므로 너와 네 자손이 살려면 생명을 택할지니라.]고 말합니다.


O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결코 이 세상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O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권세와 명예를 한손에 쥐고 잘 먹고, 잘 살면서 오래 오래 살다가 그의 말년에는 아픈 것 같으면서도 아프지 않게 3일정도 앓다가 자는 듯이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고, 그리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우리시대에 큰 별이 졌다고 떠들어 대는 수많은 조문객들의 환송을 받으며  양지바른 마련된 무덤으로 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O 바로, 그 후에, 그 죽음 이후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근본 문제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았던 간에 그는 잡혀서 멸망하게  되는 짐승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벧후2:12절에 [이들은 잡혀서  멸망케 된 ... 짐승  같아서...그들 자신의 타락 가운데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가운데 완전히 멸망하게 되리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이라고 하는 현실 세계를 사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그것은 바로 죽음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왜 사는 가?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 가? O 인간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수천, 수 만 가지의 답들을 내놓고 인간들이 아무리 떠들어 봐도 그러나 그 대답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죽음 이후에, 영원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금 이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소망의 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 죄와 사망과 멸망으로 가득 찬,  이 저주  받은 세상을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실을 놓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어리석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왔으면 간다는 죽음에 길은 알고 있으나, 그러나 생명의  길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왜, 인간이 어리석습니까? 이 세상에 온 인간은 반듯이  돌아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다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어디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O 인간이 왜 어리석은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길, 영생의 물이 있음에도 그것을  마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14: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의 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4:14절에[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땅의 사람들 중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생수인도 모르면서도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손에 닫는 것을 무엇이든지  가져다  마셔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향락과  세상에서 해 볼 것 다 해 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들의 혼에  시원함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로 처절한 고통만 안겨 주고, 그들의 혼은 더  심한  갈증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수의 샘물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의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영원한 생명수의 샘이 자신 곁에 있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세상의 속한 것들로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O 자기 옆에 맑고 시원한 옹달샘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낙엽들로 가려져서 그 샘을 발견하지 못한 등산객이 심한 갈증으로 기진하다가 결국 쓸러져 죽어가는 것처럼, 지금 자신의 옆에 영생의 샘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으로 눈이 가려져서 그 영생의 샘을 발견하지 못하고 쓸러져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O 그래서 앞으로 밝히 보고, 다가올 미래를 밝히 내다보면서 지금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로 알고 있는 대광의 성도들이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대광의 여러분들은  불타버릴 낙엽과도 같은 이 세상의 육신의 문제에 가려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영원한 생수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근본문제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육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혼의 구원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하며, 다가오는 대환란 앞서 더 늦기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불구덩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면서 그들을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삶을 살다가 주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해서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