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24:13-20절 말씀입니다.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읽는 자는 깨달으라.)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1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18 들에 있는 사람은 자기 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 19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20 너희는 피난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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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본문에서 많은 오류가 발생하는데, 한결 같이 하나님의 시대적인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3절인데,그래서 13절에 보면,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했으며, 많은 이들의 믿음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습니다.이 구절은 주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에의해 지지를 받는데,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은 이 구절을 사용하여, 미사를 계속 참여하지 않으면, 또는 카톨릭 교회에 계속해서 밀착해 있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협박합니다.그러나 만약 향상된 계시를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대적인 경륜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본문의 문맥만 올바로 이해했으면 그들의 오류는 적어도 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끝”은 결코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구원받은 어떤 신약 그리스도인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3절) 이들은 “영적인 유대인” 이 아닙니다. 이 설교의 청중들은 실제적인 유대인이고(1-3절). 언급되고 있는 장소는 팔레스타인입니다.(16절). 이들은 안식일 같은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15-20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경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15절.살후 2장).
이 “끝”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뒤따릅니다.(14,21,29절). 그러므로 이 끝은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어느 일정한 기간의 끝입니다.(14절).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끝까지 견디라는 명령이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너 희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이라.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리라](고전1:7,8).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에서 “끝”은 이 은혜 시대 에서는 어떤 조건 아래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끝” 에 대해서는 히 3:6,14절 또는 히6:6, 11절에서 말하고 있는“끝”과 같은데, 히브리서 6장에서는 이 “끝” 에 대하여 좀 더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6:4-6절에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을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는 구원받은 누군가 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에도 심각한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고, 칼빈주의자들은 그 사람들을 “원래 구원받지 않았던 사람들” 이라고 하며 (아더 핑크)근본주의자들은 구원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말하는 구절이라고 하거나(M.R. 디한),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가정” 이라고 합니다. (올리버 그린).그러나 히브리서 6:4-6절의 본문은 구원받은 누군가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3, 4장은 지속적으로 과거의 광야에서 끝까지 지키지 못하여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완악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루면서 미래에 안식에 들어갈 히브리인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은 분명히 구원을 잃어버리는 누군가를 다루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 즉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은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끝까지 견뎌야 구원 받는다는 경고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안전하다길 로마서에서는 이 사질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 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의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롬8: 38.39).14절에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더욱이 이 “끝” 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복음은 “왕국 복음”입니다.(24:14). 어떤 상태 가 조건으로 주어진 다음에 끝이 온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 “끝” 이 특정한 기간의 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왕국 복음 (천국 복음) 이 모 든 민족에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10장에서 이미 왕국 복음(천국 복음) 이 은혜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과 그 특징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임하 시어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는 왕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이며, 이 복음은 표적을 동반합니다.(마10:5.8, 마 3:2, 4:17, 23, 8:12, 9;35,10:7).
이 복음은 2000년 전에 거부된 이후에 중단되었고, 대환란 중에 유대인들을 통해 다시 전파될 것입니다. 이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메시야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이 왕국은 이스라엘의 것이며(행3:19-26). 이 왕국 복음도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합니다.(마10:58).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왕국 복음이 마태복음28:19-20절 에서처럼 이방인들 (“모든 민족”성경에서 “민족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에게 전파 되는데, 환란기간에는 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증거”로서 제시됩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이 메세지는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내용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국은 그들에게 주어졌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들이 이방인들에게 메세지와 표적으로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때 왕국 복음을 전파하는 유대인들을 대우하는 정도에 따라서 이방인들의 보장과 심판이 결정됩니다.(마l0:40-42,25;31-46).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려면 복음을 빨리 전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구절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지금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만약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 이 시대에 천국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갈라디아서 1:8절에 따라 “다른복음” 이므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구절을 붙들고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관점으로 사용하기 좋아하는 구절은 로마서 11: 25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제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 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롬11:25).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를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로 바꾸면서, 이방인들의 예정된 수가 차기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수가 차기까지 복음을 전하면 그때 주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단적 칼빈주의에 의해 오염된 교리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에 (딤전2:4)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 되도록 주님의 일꾼들을 파송하시지만, 어떤 특정한 숫자가 예정되었다는 것은 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이방인들의 충만함이란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일정한 수가 아닙니다. 23장에서 이미 다루었던 것과 같이 그것은 이방인들의 죄가 “충만하도록”가득 찼다는 뜻입니다.(마23:32 ).
로마서 9-11장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거부, 그리고 회복이라는 세대적인 진리를 다루고 있는 장입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거부한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고, 그 사이에 이방인 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 시대입니다. 그러나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되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의 죄가 가득차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입니다. 이러한 예는 출애굽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카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 들어가도록 하신 때는 그 땅의 거민들의 죄악이 가득 찼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창15:16절에 [그러나 사 대만에 그들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인들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음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땅에 대한 약속을 이루시지만 그것은 그 땅의 거민들의 죄의 정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롬11:25절의 "이방인들의 충만함” 도 같은 관점으로 설명됩니다. 아직은 이방인들의 죄악이 충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회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의 숫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14절과 로마서 11:25절의 말씀을 이 시대의 선교를 위한 말씀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이스라엘의 대환란과 재림에 관한 장임을 기억하야함)15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산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읽는 자는 깨달으라)]라고 말씀 합니다.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 은 다니엘 8:13절과 11:31, 그리고 12;11절에 기초 한 것입니다.
[군대가 그의 편에 서서 견고한 성소를 더럽히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며 멸망케 하는 가중한 것을 세우리라](단11;31).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이 미래에 적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 돌려버립니다. 구약 외경중 마카베오서에 보면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세스가 B.C.168년 키슬루월 (12월)15일에 이스라엘의 성전을 더럽히고 그 제단에 돼지의 피를 뿌린 사건이 나옵니다.(마카베오전서 2:42, 7:13, 1:54,59, 마카베오후서 4:11).그들은 다니엘 11:31절의 예언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이같이 가증한 짓을 한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지지받게 되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을 미혹한 이 누룩은 성경대로 믿지 않는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지지받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 사건을 “과거” 의 예루살렘 파괴에다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미래의 일처럼 말씀하셨는가? 주님께서는 분명히 [멸망의 가중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라고 미래의 일로서 말 씀하셨습니다.
학자들의 이론은 자기 자신이 계시록 17장의 창녀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로마 카톨릭이 퍼뜨린 속임수일 뿐이며, 성경 외의 증거, 즉 외경인 바티칸사본의 마카베오서의 기술에 근거를 둔 것이지, 결코 성경에 근거를 둔 이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니엘의 이 사건을 분명히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미래에 적용시키셨다는 것을 염두에 둔 사람들 중에는 이 사건을 A.D. 70년에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시킨 것에 적용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AD. 70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점에서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을 들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 이라고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성전에서 나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헤롯 성전의 위대함을 보여드리자 주님께서 그 성전이 무너진다고 말씀 하셨을 때 (마24:1.2, 이 구절은 AD.70년에 적용된다).그들은 바빌론의 느부캇 넷살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그 일이 다시 반복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히 반복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졌습니다. 마찬 가지로 오늘날의 무 천년주의자들은 A. D. 70년에 성전이 파괴된 그 일이 다시 반복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히 반복될 것입니다.이것은 초림 때의 상황과 재림 때의 상황이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이해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초림과 재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계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는 일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의인들에게 감추어진 신비에 대해 사도들에게 암시를 주시고 (마 13:11). 바울 에게 분명히 계시하셨으며(엡5:32,11:25).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셨습니다.(벧전1:10-12). 그러므로 초림과 재림을 나누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선지자들이 초림과 재림을 나누지 못했던 것은 그 상황이 너무도 유사했기 때문입니다.“주의 날” 에 대한 예언과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예언, 그리고 야곱의 고난의 때와 왕국의 도래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많은 사람 들이 당대에 성취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침례인 요한도 그렇게 증거 했으며(마3:2).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렇게 중거 하셨으며(마11:3-5, 10:16-23). 사도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행1:6,7, 2:16-21).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부로 말미암아 그 일은 2000년 뒤로 연기되었으며, 재림 때 다시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두 시대의 상황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초림 때에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갖추어져야 할 상황들이 재림 때와 똑같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 팔레스타인에 모여 있었고, 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왕의 선두주자 엘리야가 그리스도 이전에 나타납니다.(마11;14, 계11:3).
이러한 모든 상황이 반복된다면 재림 직전, 대환란 때 성전의 파괴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초림 때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형” 적인 사건은 안티오쿠스 에피파 네스에 의해 성취되었을지라도 그 사건 자체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다니엘의 70째 주에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 중 초림 때 성취되지 못 한 예언은 다니엘의 70째주, 즉 대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하는 천년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다니엘의 70째 주가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된다고 했는데, 거룩한 곳은 성전을 말 합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성소를 말하는데, 가중한 것이 성소에 서고, 희생제가 금해지고, 성전이 더럽혀진 후에는 하나님의 회복을 통하여 성소 가 깨끗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단8:14, 9:24).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회복이며, 다니엘 9장을 통해 그 일은 다니엘의 70째 주 동인에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소를 더럽힌 그 때는 다니엘의 70째 주가 아니었으며, 그 이후에도 성소가 깨끗해진다거나 죄악이 종결된다거나 영원한 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단9:24).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게 되는 대환란 때에는 문자적인 제단에 문자적인 제물이 드려집니다. 그때 죄의 사람, 즉 멸망의 아들 (살후2:3)이 등장하여 성전을 더럽힐 텐데, 계11:1-4절은 다니엘 8,11장에 대한 성취입니다. 그는 자신을 육체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며 (살후 2장).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경배하도록 할 것입니다.(계13장).
경배 받는 자로서 그는 유대인들의 희생 제사를 대체할만한 회생제사를 요구할 것입니다.(단8, 11장, 레 1.7장). 그 제물 들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적그리스도는 성전 뜰에 있는 제단에서 인간 제물들을 목베어 죽일 것입니다. 지금 로마 카톨릭에서 매주 행하고 있는 "미사“ 는 희생제를 바치고 그 살과 피를 먹는 의식인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삼아 그분을 매주 죽이고 그 살과 피를 매주 먹습니다. 피를 먹는 것은 성경 어디 에서도 금해진 것인데, 로마 카톨릭의 이러한 가증한 일과 마찬가지로 대환란 때에 유대의 성전에서 적그리스도의 사제들은 “미사” 라는 이름으로 그인간 희생 제물들의 피를 마실 것입니다.(요6:40-71,계20:4,레1장,계6:9-11 6:13,시16:4, 14:4). 이 죄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는 타락하기 전 셋째 하늘에 있을 때에는 원래 기름부음 받은 다섯 번째 그룹으로서, 보좌를 덮는 위치에 있었습니다.(겔28:13-16,계4: 7,겔1,10장). 그래서 그는 자기의 이전 위치를 찾고 싶어 하는데, 바로 모세의 성막에 있던 지성소, 곧 그룹들이 덮고 있던 그 자비석입니다. 그래서 대환란 때에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땅에 있는 성전의 자비 석 위에 앉아, 이사야 14:13.14에 나타난 그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위치가 되어 경배를 받고, 또 희생제 사를 받을 것입니다.
0 16절에[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16절은 마태복음 24장의 본문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 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이들은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약속 아래 있는 유대인들이고, 기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림 직전입니다.
29절 이하에는 이러한 사건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해주는데, 만약 이 사건이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에 적용된다면 A, D. 70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16-18절에[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은 자기 옷을 가지러 돌아가 지 말라]고 하십니다.대환란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12:1-15, 미카 7:14-16, 예레미야 50:19,20절 호세아 2장 등에서 자세히 말 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미가7:14절에 [주의 백성을 주의 지팡이로 먹이소서. 칼멜의 한가운데 삼림 속에서 외로이 거하는 주의 유업의 양떼를 먹이소서. 옛날처럼 바산과 길르앗에서 그들 을 먹이소서]라고 말씀 합니다. 또 렘50:19절에 [또 내가 이스라엘을 그의 처소로 다시 데려오리니 칼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며 그의 혼이 에프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게 되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시내 산 광야 에돔 땅 페트라에 유대인들을 데려다가 부양하질 것입니다. 그래서 호2:14-15절에 보면,[그러므로 보래 내가 그녀를 꾀어 광야로 데려가서 그녀에게 위로하여 말하리라. 또 내가 거기에서 그녀에게 그녀의 포도원을 주고 아콜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으리니,그녀가 거기에서 그녀의 젊 은 시절처럼,또한 그녀가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 노래하리라]고 말씀합니다.교회는 대환란을 통과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명령들은 전혀 교회와는 관계없는 명령들입니다. 교회에게는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주신 적이 없으며, 아이를 낳지 말라는 명령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19절에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을 다 합쳐서 아이를 낳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예레미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렘16:2절에 [너는 이곳에서 네게 아내를 취하지도 말며 아들들이나 딸들도 두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그는 아이를 낳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결혼을 하지 말라고 명령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을 금하는 명령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습을 통해 결혼을 명하셨습니다.(엡5장). 물론 로마 카톨릭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던 시대 였습니다.그 시대는 앞으로 다시 이루어질 대환란의 시기에 대한 모형입니다. 바빌론의 느부캇넷살 왕은 구약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모형 중에 하나입니다.또 한 그가 바빌론의 왕임을 기억해 볼 때 대환란 기간에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가 바빌론으로 불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계l7장).
예레미야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인 대환란 때에 있게 될 유대인 “남은 자” 를 정확하게 예표합니다. 이 “남은 자”들은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 딸” 등으로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환란기간에 남을 이스라엘을 염려하시면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그 날이 오면 그들이 말하기를 잉태할 수 없는 자와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태와 빨려 본 적이 없는 젖이 복이 있도다” 하리라](눅23:28-29).누가복음 23:29절은 정확하게 마태복음 24:19절의 사건을 지적합니다.누가복음 23장 또한 마태복음 24장과 같이 대환란을 말하는 장인데, 연속되는 구절인 눅23:30-31절에는 사람들이 산과 언덕에게 자기들 위에 무너져 내리라고 자신을 저주 하는 모습은 계시록 6:16절에서 정확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은 분명한 미래의 대환란의 장이며, 이것은 예레미야로 예표됩니다. 마태복음 2:16-17절 에서도 예레미야의 예언, 즉 라헬이 통곡하는 모습을 말하면서 대환란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3:31절에서 “푸른 나무” 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를 누리는 이스라엘을 말하며,“마른 나무” 는 종교 창녀 로마의 압제를 받으며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겔17:22-24). 그러므로 자녀를 낳는 일이 금지되는 시기는 대환란 기간입니다.
이 경고는 교회 시대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대환란을 당하는 유대인, 특히 팔레스타인 땅에 거하는 유대인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경고입니다.20절에[너희는 피난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안식일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 구절도 그리스도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안식일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과는 다릅니다. 특별히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안식일은 팔레스타인 땅에 머물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켜야 하는 규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 으로 들어가면 그 땅으로 주께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25:2).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킨 것도 이집트를 탈출하여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지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대부분의 율법은 팔레스타인 땅과 관련해서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위대한 왕의 도성”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여겨졌고(마5:35).하나님께서 계셔야만 그들의 율법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경배도 예루살렘 성전 외에서는 행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예루살렘을 향해서 창을 열어 두고 기도했던 것입니다.(단6:10).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땅과도 관련이 없는 이방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그러나 재림 직전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모입니다.(이미 모였다. 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는데, 대환란이 안식일에 닥치면 그들은 꼼짝 않고 당하게 됩니다.
특별히 여기서 “피난하는 일” 이 영어로 [비행하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주목해야합니다. 요한계시록 12:14절은 이 사실을 [그때 그 여인이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는데,이는 그녀가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서 그곳에서 그 맴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부양받으려 함이더라]라고 묘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대환란 때 유대인들을 광야로 피난시키시는데, 주님은 그들을 비행기에 태워 피난시키실 것입니다. 20절예서 특별히 안식일을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에 는 비행기가 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환란이 안식일에 일어난다면 그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고
끊임없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