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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박종각 2018. 1. 7. 02:16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주   일   예   배
                                     롬9:14-33절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가엾게 여길 자를 가엾게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 17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8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그러면 네가 내게 “어찌하여 그분께서 여전히  잘못을  찾고 계시며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였냐?”라고 말하리라.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이에게“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22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23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느냐? 4 곧 우리에게니 그가 우리를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않았던 그녀를 사랑받는 자라고 부르리라. 26‘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리라.”고 하셨느니라. 27 또한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부르짖기를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28 그가 그 일을 완수하시고 의 가운데서 속히 이루시리니 이는 주께서 땅 위에서 그 일을 속히 행하실 것임이라.”하였느니라. 29 또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한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또 고모라와 같이 되었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 31 그러나 의의 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2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이라. 그들이 그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넘어진 것이라.  33 기록된 바와 같으니“보라, 내가 시온에 그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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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바울은 지난 시간에 [리브가가 쌍둥이 아이를 잉태했을 때] 하나님께서  형이  아니라 아우를 택한 것을 예로 들면서, 롬9:11절에서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라는 말이 어떤 말인가를 우리에게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택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아기들이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아기들이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그 상태에서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O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택하심은 이미  만세전부터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구원받을 사람들과 지옥 할 사람이 확정된 것이라면, 목숨을 걸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또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에 의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O 그래서 만일 누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이미 만세전에 탁함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성경을 무시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멸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만세전부터, 나를 택해 주셨기 때문에, 그 택함에 의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O 주께서 갈보리에서 피 흘려주신 그 사실의 바탕 위에서, 전해지는 주님의 복음을  우리가 받아드리고,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할 때, 비로써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택함]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하게 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O 이제 본문 14절을 보면[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우인 야곱을 사랑하시고, 형인,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의하지 않으시며, 절대로 불의한 일을 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O 15-16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가엾게 여길 자를 가엾게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이 말씀의  핵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전의, 구약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10-14절이 그렇고, 15-17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누구도 거듭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심을 받은 사람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O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사항은,  바로 [원하는 자에게 의해서도 아니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원함]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고 구원을 받는 것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항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 이야기를 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O 그래서 구약 시대에서 [원함] 즉, 나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대상인가, 아닌가,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가엾게 여김을 받을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가,아닌가에 대한 여부만을 판단하고 결론에 도달하는 대에만, 나 자신의 [원함]즉, 나의 [의지]가 사용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O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다거나,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엾게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실지,  아닐지의 여부였고, 그리고 이것을 내가 아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하기도 하시는  분이라고 18절에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까, 아니면 완악하게 만드실 것인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적 상황인 것입니다. O 그 반면에, 이 하나님의 자비를,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신약 적으로 적용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실 때, 아주 분명한 조건 한 가지  갖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분을 믿으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를 믿지 않으려 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악한 상태로 저주 받은 상태로 멸망의 상태로, 그냥 그대로 놓아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도록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O 17절에[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O 여기서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기를 라고 하시는 것은  성경 자체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던 이유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또,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완악함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O 그래서 18절에서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집트  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완악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얼마나 완악한 자인지를 이미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3:19절에 보면, [내가 확실히 아노니, 어떤 강력한 손으로도 이집트 왕이 너희를  결코 가게 하지 아니할 것이나]라고 말씀 하십니다.


O 물론, 바로가 이토록 완악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손을 쓰신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무엇인가 행하기를 시작하시기 이전에 어떤 강력한  손으로도 이스라엘백성들을 나가게 하지 않을 만큼 그의 마음은 이미 완악한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O 그래서 출5:1-2절에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들어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나니,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로 광야에서 내게 명절을 지키게 하라.  하시나이다. 하니 파라오가 말하기를,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말을 복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스라엘로 가게 하지도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O 이처럼 바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기 스스로 자기 의지를 움직여 자신이 완악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도록 예정하셨지만, 그러나 그 완악함 역시, 사실은 그 자신이 먼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나타낸 반응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O 19-20절에[그러면 네가 내게 "어찌하여 그분께서 여전히 잘못을 찾고  계시며,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였느냐?"라고 말하리라.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릇을 지으실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릇을  만드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도에서 그 그릇의 용도를 다른 목적으로 바꾸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그릇의 사용 목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렘18:3-4절에[그때 내가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갔더니, 그가 물레들 위에서 한 작품을 만들었더라.그가 진흙으로 만든 그 그릇이 그 토기장이의 손에서 손상을 입었으니, 그 토기장이가 그것을 만들기에 좋게 보이는 대로,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만들더라.]고  하십니다. 
O 그리고 이어 렘18:6절에서는,[주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아, 내가 이 토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느냐? 보라, 오 이스라엘 집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쁜그릇도 내버리지 않으시고, 좋은 그릇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O 또 어떤 경우에는, 좋은 그릇을, 더 좋은 그릇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그릇을 다른 용도로 바꾸거나, 더 좋은 그릇으로 만드는 대신 아예  깨뜨려 버려서 지옥으로 내던져 버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19:10-11절에[그때 너는 너와 함께 가는 사람들의 목전에서 그 병을 깨뜨리며 그들에게  말할지니,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 한 개를 깨뜨리는 것과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그렇게 깨뜨리리니,  다시 온전하게 만들어질 수 없으리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O 21절에 [토기장이가 같은 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삼상 2:6-7절에 [주께서는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시고, 음부로 끌어 내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O 네가 하는 대로 내가 대해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삼상2:30절에 [나를 존중하는 자들을 내가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내가 소홀히 여기리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귀하게도 하시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천하게도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귀한 그릇이 되게도  하시고,  이보다는 덜 귀한 용도와 기능을 가진 그릇이 되게도 하시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구원받지 못한 천한 그릇이 될 경우에는 그대로 지옥 쓰레기장에 내던져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O 그래서 딤후 2:20-21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뿐만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도 있어 어떤 것들은 귀히 여기고 어떤 것들은 천히 여기느니라.그러므로 이런 것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되느니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22-24절에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 된 자비의 그릇들에 대해서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으니 그가 우리까지도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 그리고 그가 즉시 응답할 때, 주께서는 그를 데려다가 알맞은 자리에 그를 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을 받아 누릴 준비를 갖추도록 하게 하십니다.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상황 속에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데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끝내 거부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를  특수한 틀에 부어  아주 이상스런 그릇으로 빚어져 나오게 하시되, 하나님의 진노와 복수를 담아 누려야 할 그릇으로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O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그에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진노의 대상이 되는 자에게는 진노의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데서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아무에게서나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렇다고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진노의 하나님도 아니신 것입니다.  24절에[그가 우리까지도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것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O 하나님께서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 된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으되, 그러나 유대인들 모두가 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O 그래서 27절에서 바울은 [또한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부르짖기를,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전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전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이 아니며, 또 유대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자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O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비를 바라지 않고 제사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9:13,막12:7)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오직[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O 왜냐하면, 이 [남은 자] 들만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일들을 순종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O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15:24절에서[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11). 그러나 요1:12절에서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고 주님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O 25-26절에 [호세아의 글에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나의  백성이라, 사랑하지 않은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리라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리라."고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들입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도 역시 유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도 아닌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O 그래서 요1:12절에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따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누구든지]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주의 은혜로 구원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우리들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내 백성]이요, [사랑받는 자]라고  부르시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O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우리가 호응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O 27-28절에 [또한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부르짖기를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 그가 그 일을 완수하시고 의 가운데서 속히  이루시리니, 이는 주께서 땅 위에서 그 일을 속히 행하실 것임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O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남은 자]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신 이후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과 깊이 관련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성케 하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이라는 특별한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성경의 모든 역사는 바로 그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O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번성할 때는 그 땅에서 번성하는 것이요,  만약,그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 하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들이 타국 땅에서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다시 돌이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서,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한 후,모세는 그 땅에 관한 축복을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었고, 솔로몬은 그 땅에서 번성케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으며,그들이 바빌론 땅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그들은 그 땅을 생각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땅에서 번성한다, 는 이 언약은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세를 통해서 구체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그들을 향해 예언하며 활동했을 때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그들의 민족에게 가득  차게  되었고,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그 땅에서  흩어질 때였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는 그들 모두를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수만이 구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만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는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했던 자들인 것입니다.

O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자]만을 그 심판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장정만 60만 명이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노인들과, 그들을 따라 나온 이방 족속들, 그래서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백성들의 총 숫자는 수백만이었습니다.

O 이렇게 나온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고 완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도 그 죄에 가담하지 않았던 극소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여호수아와 칼렙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만 남기고 이집트에서 나온 수백만의 모든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다 죽었습니다.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 두 사람과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단 한 번도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해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그분의 눈은 언제나 [남은 자] 즉,당신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극히 적은 소수만을 향해 계셨고, 그리고 언제나 그 남은 자들, 즉 당신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그 소수만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매우 좋아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을 많은 무리로 세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O 어리석은 인간들은 수가 많으면, 거기에서 위대한 힘과 능력이 나오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송사리떼처럼 우굴  거려도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힘은 사람의 숫자가 많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바로 우리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남은 자]인 소수의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O 그리고 하나님의 이같은 심판은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있을 것인데,그것이 바로 대 환란입니다. 때도 이스라엘의 수백만의 대다수 사람들은 멸망하지만, 그러나 소수의 [남은 자] 만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되, [남은 자만]즉, 대 환란 기간 동안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견딘 자들만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아주 적은 수의 남은 자라도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았을 것이며, 우리는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O 그래서 30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고 말합니다. O 그렇습니다. 원래는 이방인들이 의를 따랐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의를  따랐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였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의에 이른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난 의를 따랐기 때문이고, 이방인들은 [믿음에서 난 의]를 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O 그래서 31-32절에 [그러나 의의 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율법의 행위로 구하였기 때문이라.그들이 그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넘어진 것이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O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의를 따랐으되, [의의 법]으로  따랐고, 그 [의의 법]을 성취할 수 없으므로, 결국 의에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의는,  유대인들이 결코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만이  이룰 수가 있는 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하지 않다가 결국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0 그러나 믿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O 33절에[기록된 바와 같이, 보라, 내가 시온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O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지만,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들 앞에 놓여 진 하나님의 의이신 반석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서 그들에게는 넘어지는 돌과 거침이 되고 함정이 되고 올무가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를 모르는 자들, 즉 이방인들은,  오히려 그 주를 믿고, 구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O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의이신  산돌과, 반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러주신 그 구속의 그 피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서 그가 징계를 받으셨고, 주께서  맞으신  그 채찍으로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영원히 죽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적인 모든 악한 것이 치유 되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O 우리는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들을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들이  완전하게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때 주께서는 이런 우리의 믿음을, 의로 삼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므로, 우리가 죄와 사망과 멸망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주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면서, 우리의 삶이 다 할 때까지 오직 주 만을 믿고, 주 만을 의지하고, 주 만을 신뢰하며 주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다가, 주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해서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