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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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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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
요11:28-57절. 말씀입니다.
O 먼저 28-35절을 보겠습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한 후에 가서 자기 동생 마리아를 은밀히 불러 말하기를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니 29 그녀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주께로 오더라. 30 예수께서는 아직 고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하던 그곳에 계시더라. 31 그러므로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하며 그녀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은 그녀가 급히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 나가며 말하기를 “무덤에 가서 울려고 그리로 간다.”고 하더라. 32 마리아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와서 주를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리어 말씀드리기를 “주여, 만일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니 33 그때 예수께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34 말씀하시기를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고 하시자 그들이 “주여, 와서 보소서.”라고 말씀드리니 35 예수께서 우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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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28절에 [그녀가 이런 말을 한 후에 가서 자기 동생 마리아를 은밀히 불러 말하기를“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신 다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주께서 마르다와 마을로 들어오시면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자신을 찾으신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일어나 주께로 달려갑니다.(29절).그러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모여 있던 유대인들도 마리아가 그의 오라비의 무덤으로 가서 울려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갑니다.(31절).그리고 주께로 달려온 마리아는 울며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마르다가 말했던 것처럼 “주여, 만일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32절).
O 이 말은 마르다나, 마리아가 주를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우리가 주님께 연락을 했는데도 주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라비가 죽었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주께서 우리와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동생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3절에[그때 예수께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신음하시며]괴로워하십니다. 여기서 [영]이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O 그러기에 주께서는 사람의 영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35절에[예수께서 우지더라]고 말씀 하십니다.
O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세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곳에서는, 눅19:41절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고, 또 한 곳은 히5:7절에서,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였으며, 그리고 나머지 한곳은, 바로 여기 35절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셨다.”는 것은, 모두 인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죄와, 그 죄의 결과에 연관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O 그래서 사53:5절에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사로의 혼은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혼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O 다시 36-40절에[36 그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주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라!”고 하더라. 37 그러나 그들 중 몇 사람이 말하기를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하니 3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신음하시며 무덤에 오시니라. 그곳은 굴인데 돌이 그 위에 놓여 있더라. 39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을 치우라.”고 하시니, 죽은 자의 누이인 마르다가 주께 말하기를 “주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기에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라고 하니 40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O 37절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막으실 능력이 있으신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8절에 보면, 주께서는 또다시 속으로 신음하시면서 그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시고, 또 신음하시는 것은 결국 죄 때문에 인간은 죽게 되고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께서 고난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면서 오는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 오신 예수께는,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십니다(39절).
O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역사하실 때마다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때도 [항아리에 물로 채우라](요2:7절)고 종들에게 지시하셨고[이제 떠다가… 가져다주라](요2:8)고, 또 명하셨습니다. 하다못해 병자를 고쳐 주실 때에도 장본인에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명하시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요5:8절에[일어나서....걸어가라]고 하셨고, [가서....씻으라](요9:7).고 명하셨으며,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제자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셨습니다(요6:11). 그리고 지금 여기서도 [돌을 치우라]고 사람들에게 명하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O 그래서 이것은 지금 그것을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주님은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것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행12장을 보면, 베드로가 옥에 있을 때 밤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깨우며 일어나라고 말할 때 베드로를 결박했던 쇠사슬들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감옥을 나와 큰 철문 앞에 서자 그 철문이 저절로 열립니다. 이처럼, 주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손을 대지않고 자동적으로 열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O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너희가 자연스럽게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치우라]고 주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막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다”입니다.
O 그래서 39절에서 그는 “주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기에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는, “행동파”였습니다. 마르다는, 동생의 죽음을 그토록 슬퍼하고 있었고, 주님께서 오시기만을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 앞에서 자신의 불신을 들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O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의 주머니 속에 그 믿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그 무엇, 즉 “말씀”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바람만 들어 있다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믿음의 주머니 속에 능력의 말씀은 없고, 단지 말로만 하는 고백하는 입 바람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O 왜냐하면, 믿음의 능력은 우리의 입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믿는다는 말만을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러한지를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13:5절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입증 될 수 없는 말만을 내 세우는 믿음은 마귀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0 그래서 약2:19절에 [네가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니 잘하는 것이라. 그런데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력이 좋지 않는 학생도 시험을 자주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늘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지금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는 것은 그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보안해 나갈 수 있으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진짜 시험 앞에 예비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O 그런 예비시험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진짜 시험을 만나게 되면 그런 사람은 넘어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아닌지, 자신이 지금 믿음으로 사람인지 아닌지를 수시로 정검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짜 시험의 때에도 그렇게 크게 요동함이 없이 믿음의 길로 나가게 되지만, 그러나 그런 시험을 치루지 않고 계속 입으로만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진짜 시험의 때가 올 때는 평소에 자신이 말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O 그런데 대개는 시험을 치루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요,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주를 위해서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주를 위해 무엇은 못하겠느냐고 말하기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하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요,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실제상황의 시험지를 받아 드는 순간,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한 사람임을 들러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O 평소에 베드로는 믿음을 버리고 뒤로 물러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의 후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교의 믿음을 소유한 그런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마26:35절에 보면, 그는 “설령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말합니다. 요11:16절에 보면, “도마”라는 제자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유대로 가자고 말씀 하실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제자들을 독려했던 것입니다. 이들뿐만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그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고, 역시 예수님의 제자다웠습니다.
O 그런데 그들의 그 훌륭한 믿음들은 사실을 말하면 “말”로만, 단지 “입으로만”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실제 “시험지”가 던져지자 그들은 한 사람같이 시험지를 펼쳐 보지도 않고, 모두 다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26:56절에 [...그때에 모든 제자가 주를 버리고 도망가더라.]고 말씀합니다. 막14:52절에 보면, 어떤 제자는 너무 급한 나머지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O 그렇다면, 순교를 고백했던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에게 시험지가 던져지자, 그는 다른 제자들하고는 다르게 시험지를 받아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답안지는 예수님의 제자답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답안지에 “나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른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그를 저주하고 맹세하노라.”라고 써놓고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마26:74) 총칼을 들이대는 시험 관독관에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시험 감독관은 작은 여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앞에게 그렇게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들어 낸 것입니다. (마26:72)
O 만약, 나사로의 무덤 앞에만 아니었다면 “마르다”는,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이스라엘의 공회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대 제사장들도 믿지 못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고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O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백보좌 심판을 믿었고 그는 부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확인되지 않는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는 그런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편리한 대로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이라면, 그의 마음에서는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확인할 수가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는 믿어지지 않아도 사람들 앞에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믿음을 입으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O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입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르다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때, 마르다는 여지없이 그의 “불신” 얼굴을 들어 내고 만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한다 해도 그러나 그러기 전에 이미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아시고 계십니다. O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기 전에 주님은 먼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O 그래서 주님과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회심하게 되면 네 형제들을 굳게 하거라.”(눅22:32). 주님께서는 마르다의 연약한 믿음을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O 그러기 때문에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경우에도 “믿어라.”는 말입니다. 네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라도 너는 내가 그 일을 해낼 것이라는 사실을 “너는 믿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너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기적이 너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는 역사, 생명의 역사, 영광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은 상식으로는, “믿지 못할”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O 마르다는 시험문제를 받아 보기 전까지는 어떤 문제라도 능히 풀을 수 있는 실력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정평이 나 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험문제를 받아든 마르다는 천지가 캄캄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하고는 상황이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다르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나사로 무덤 앞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비록 예수님 앞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O 차를 운전하다 보면, “가변차선”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가변차선“ 차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 교통 상황에 따라 막히는 도로를 원활하게 소통시키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운용하는 차선을 말합니다. 양 방향의 도로 중에 어느 한쪽이 차선이 막히면, 막이지 않는 차선 한 개를 막히는 쪽에서, 임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개의 차선은 교통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편리하게 변경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반대 반향으로 바꿔지는 차선이기 때문에 금세 전혀 다른 차선을 바꾸어 질수가 있기 때문에 신호체계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이 차선으로 들어 가야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상대방 차하고 정면충돌 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하게 되는 약점이 있는 차선입니다.
O 그런데 마르다의 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믿기는 믿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고, 환경에 따라 변하는, 언제라도 자신의 편의에 따라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가변적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과 신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아주 소통이 잘되고 탁월한 믿음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상황에 맞고 융통성 있게 운용되기 때문에 이 신앙은 세상 적이며 종교적이며, 사회적이며, 신사적이며, 지적이며, 아주 현명하며, 매우 합리적이며 세상에 어떤 사람과도 마찰 없이 잘 어울리고, 어느 환경도 잘 적응하며, 답답하지도 않고, 모나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고, 세상과 특별하게 구별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나타내면서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O 그러나 이런 믿음과 신앙에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는 못한다.”는 믿음과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무덤 입구를 열게 하시고 아주 위대한 “일”를 하시고자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즉시 주를 향해서, [주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기에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의 이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O “주님! 주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기 전에나 필요한 것이지, 주님이 보시는 대로 나사로는 죽었고, 그 죽은 지가 벌써 4일이나 되어 지금 그의 몸이 썩은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 판에, 주님께서 이 무덤 문을 여시고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지금 주님께서 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제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틀렸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보시면 모르시겠습니까? ...바로 이 말입니다.
O 이것은 이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도 합니다.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하고 할 것은 다 하면서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상황” 에 따라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7:29절에 보면 수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은 상황에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참 믿음이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눅18:42절에 [“네 눈으로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롬10:9)
O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믿기는 믿되, 그러나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분위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마르다의 믿음이고,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믿음과 신앙은 한 마디로 “탁 보면 압니다.”라는 것입니다. O 다시 말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인지, 가능한 일인지, 기도를 해도 되는 것인지, 기도해봐야 헛일인지] “탁 보면” 벌서 상황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볼 때 상황이 끝난다고 생각될 때는 “믿고 기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O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은 상황을 보지 않고 주를 보는 믿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주시는 믿음은,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믿음은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내가, 내 속에서 생산해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머리나,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지식에서나, 그렇다고 우리의 기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말씀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인 것”이라고, 성경 롬10:17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O 그래서 40절에서 주께서는 마르다에게[...만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O 41-44절을 읽어 봅시다. [사람들이 죽은 자가 놓여 있는 곳에서 돌을 치우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아버지께서 항상 내게 들으시는 줄 내가 알았나이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은 여기 둘러서 있는 무리 때문이니, 그들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시더라.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음성으로 외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 44 죽었던 자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진 채 나오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고 하시니라.] O 41절에 [사람들이 죽은 자가 놓여 있는 곳에서 돌을 치우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말씀 하시기를, 아버지시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 하십니다. 주께서 마르다의 믿음을 지적하시자 사람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무덤 입구의 돌을 치웁니다.
O 그러자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먼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도하시면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베다니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을 때부터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자신이 기도 드릴 때마다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O 왜냐하면, 주께서는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요8:29)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일3:22절에[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들을 행함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42절에 [이제 내가 말한 것은 여기 둘러서 있는 무리 때문이니, 그들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0 칼멜 산의 엘리야도 이와 유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왕상18:36-37절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이 모든 것을 주의 말씀대로 행하였다는 것이 오늘 알려지게 하소서...이 백성으로 주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O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지금 나사로의 무덤 밖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 주심으로써 자신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심을 다시 한 번 더 입증해 보이시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모든 증거들을 직접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O 그래서 주께서는 나사로의 시체가 들어 있는 무덤까지 오셔서 그들의 손으로 직접 돌을 치우게 하시고, 그들의 코로 직접 썩은 냄새를 맡게 하시며, 그들의 눈으로, 직접 나사로가 일어난 것을 목격하게 하시고, 또 그들의 손으로 직접 수의를 풀어 주게 하신 것입니다.
O 그리고 43절에[이 말씀을 하시고 큰 음성으로 외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께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거기서 나오라고 외치십니다. 요10:3절에[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휴거가 이루어질 때, 장면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 될 것입니다.
O 44절에 [죽었던 자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진 채 나오더라, 예수께 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께서 큰 음성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몸에 수의를 감은 채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그 누구도 이런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O 다시 45-52절에 [그때에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본 많은 유대인이 주를 믿었으나 46그 중 몇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하더라.47이에 선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하고 말하기를“이 사람이 많은 기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찌하랴? 48만일 우리가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처소와 민족을 다 빼앗아 가리라.”고 하더라. 49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 즉 그 해의 대제사장인 카야파가 그들에게 말하기를“너희가 아무것도 모르며 50 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치 않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줄을 너희가 생각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니 51이것은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52 그 민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멀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함께 모으려 함이었더라.]고 말씀하십니다.
O 여기에 보면 주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이 사건을 본 많은 유대인들은 주를 믿었지만 그런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못한 몇 명의 유대인은 바리새인들에게 와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게 대해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공회를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며 있을 때, 바로 대제사장인 카야파가 그들의 마음에 기름을 끼 얻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아무것도 모르며.....생각지 못하는 도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치 않는 것]에 대하여 거론합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인 카야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다는 사실이었고, 또 죽으셔야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O 그리고 51절에 [이것은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언하고 있는 것을 자기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O 그것은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었기]때문이었습니다.
O 그렇다면, 주께서는 가야바처럼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입에서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O가야바처럼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O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이 강력하게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O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시고 그분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O 우리는 그 사실을 민수기 24장의 발라 암 통해서 분명히 확인 수 있습니다. “발라 암”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위대한 선지자로, 위대한 예언가로, 위대한 설교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도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하려고 아주 많은 고관들을 보내면서 민22: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네게 청하노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이는 네가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을 내가 앎이라.”]고 말합니다.
O 그러나 사실 이 사람은 자신이, 위대한 선지자로, 예언가로, 설교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꿈에도 모르고 있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이름을 휘날리며 안 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는 아주 유명한 목사요, 설교가요, 부흥사요, 목회자라고 떠들어 대는 사람 중에는 이 발라 암처럼 자신이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O 그렇습니다. 성경은(유다서11-12), 발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못 박고 있고, 요한계시록도 그가 잃어버린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계2:14), 베드로후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벧후2:15). 발라암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거짓 선지자였고(벧후2:15).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거치는 돌을 놓게 하였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도록 간계를 꾸민 자였습니다.
O 그런데도 민24:2절에[발라암이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파대로 자기 장막에서 거하는 것을 보자,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신지라,]고 말하십니다. 계속해서 민24:3-4절에 보면, [그가 그의 비유를 지어 말하기를, 브올의 아들 발라람이 말하며 눈을 뜬 자가 말하였나니,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은 자, 전능하신 분의 환상을 본 자, 무아지경에 빠졌으나 자기 눈을 뜬 자가 말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어쩌다가 한 마디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구원도 받지 못한 발라 암은 본격적으로 설교자요 예언자가 되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민24:16) 구원도 받지 못한 자, 발라 암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1500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까지도 예언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O 그래서 민24:17절에 [내가 그를 볼 것이나 지금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볼 것이나 가깝지 않도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 올 것이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 모압의 구석구석을 쳐서 셋의 모든 자손들을 멸망시키리라]고 말합니다. 여기 구원도 받지 못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아주 강력하게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받지 못한 자가 환상까지 보면서 예언하고 명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O 52절에[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함께 모으려 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단지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분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구원받은 이방인만이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가 펼쳐집니다.(53절),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계획하신 때가 이르기까지 그들을 피하여 에프라임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십니다.
O 그리고 주님께서 공개적인 사역을 하시는 동안 네 번째로 맞이하시게 될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55절) 그래서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마지막 유월절이 닥치고 그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명절 때마다 반드시 성전에 올라가셨었습니다.(56절)그런데 이번 유월절은 다른 때와는 달리 주님께 대한 체포령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궁금증은 오히려 당연했습니다.
O 57절에 [그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명령을 내렸으니, 이는 만일 누구든지 주가 어디에 있는 것을 알면 이를 알려서 주를 붙잡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드디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체포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회가 발표한 포고령의 배후에 [여자의 씨]에 대적하는 뱀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거 되는 가운데 부활과 생명이신 주님의 능력이 유감없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망의 권세를 지닌 사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O 이 세상 통치자 사탄으로서는 도저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살해 계획을 진행하도록 뒤에서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결국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O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는 것이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9:21절처럼, 결국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지만 오직 주의 권고만이 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14:24절에서도 [만군의 주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계획했던 대로 그것이 확고히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악인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지를 바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 받은 삶을 살다가 예수의 날, 그리스도의 날,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서 주와 영원히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