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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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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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3:1-18절입니다.
O 먼저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나왔는데, 그와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와 롯도 그와 함께하여 남쪽으로 가니,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으로 매우 부유하였더라. 3 그가 남쪽에서 벧엘에 이르기까지 이동을 계속하여 벧엘과 아이 사이 처음에 그의 장막을 쳤던 곳에 이르니라. 4 아브람이 처음에 제단을 쌓았던 자리인 그곳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니라.]
0 창12장을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얼마동안 하란에 머물다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란을 떠나 마침내 롯과 함께 카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카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은, 그 땅을 통과하여“세켐 땅 모레의 평지”에 이르게 되됩니다.(창12:6.). 그런데 그때“주께서”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창12:7).여기“주께서 나타나셨다”는 말은, 주께서“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아브람은 그곳에다“주께 제단을 쌓았습니다.”그리고 나서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으로 자리를 옮겨, 벧엘과 사이에 임시“장막”을 쳤습니다.
0 아브람이 장막을 친 곳에서 서쪽을 바라보면,“벧엘”이 있고, 동쪽으로는“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장막을 친 곳에서 다시“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창12:8). 이것은 아브람이 카나안 땅으로 들어온 후,“두 번째 쌓은 제단”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아브람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0 아브람이 한 곳에만 계속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은, 아브람은 많은 가축들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롯의 가축들까지 함께 있어, 이 많은 가축들이 그곳에 풀을 금세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쪽지역은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아 극심한 기근이 있었습니다.(창12:10) 그래서 아브람은 다시 이집트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집트는“함”의 자손들로 성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0 그래서 아브람이 이집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안전을 위해 먼저 해결해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성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집트인들은 남의 부인이 예쁘다 싶으면 그의 남편을 죽이고, 그 여인을 빼앗아 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부인“사래”는, 이집트 사람들이 아브람을 죽이고 빼앗아갈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사래”를, 자신의“누이”라, 하자고 사래와 합의하고 이집트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0 그리고 아브람이 이집트로 들어갔을 때는 벌써“사래”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이 이집트에 퍼지게 되었고, 이 소문은 파라오에게 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지체하지 아니하고“사래”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고자 궁으로 데려가게 된 것입니다.
0 그러나 아브람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즉시 개입하셔서“파라오와 그 집안에 큰 역병으로 재앙”을 내리셨고, 그로인해서 아브람은 무사히 사래를 되찾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이집트에서 나와 다시 카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도 롯은 여전히 아브람과 함께 있었습니다.(1절) 다시 2절에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으로 매우 부유하였더라]고 말씀 합니다.“은과 금”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악을 연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6:10절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0 다시 3-4절에 [그가 남쪽에서 벧엘에 이르기까지 이동을 계속하여 벧엘과 아이 사이 처음에 그의 장막을 쳤던 곳에 이르니라. 4 아브람이 처음에 제단을 쌓았던 자리인 그곳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아브람은 이집트로 들어갈 때와는 역순으로 다시 카나안 땅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0 그래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나와 남쪽을 통과해서 처음 장막을 쳤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에 장막을 치지 않고, 계속 이동해서 처음에 제단을 쌓았던 자리 즉, 카나안 인들이 살고 있던 [세켐 땅 모레의 평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0 [세켐 땅 모레의 평지”는 아브람에게는 특별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1) 아브람이 처음 카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 주께서 직접 나타나신 곳이었고, 그리고 2)“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3) 또, 카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처음 주께 제단을 쌓던 곳도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나와 남쪽을 지나 처음 장막을 쳤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도착한 아브람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서“처음 제단”을 쌓던 곳에 와서(창12:6.7),“세 번째 제단을 쌓고 주를 불렀던”것입니다.(7절)
0 5-9절에[아브람과 함께 갔던 롯도 양떼와 소떼와 장막들을 소유했더라. 6그 땅은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으므로 함께할 수 없었음이라. 7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고 또 그 당시 그 땅에는 카나안인과 프리스인도 거하더라. 8그러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기를“내가 부탁하건대, 우리가 형제간이니, 나와 너 사이에와 나의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 다투지 않게 하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내가 부탁하노니, 나에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갈 것이요, 또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하니,]라고 말씀합니다.
0 5-6절에 [아브람과 함께 갔던 롯도 양떼와 소떼와 장막들을 소유했더라.6그 땅은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으므로 함께할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땅은 그들의 가축 떼를 먹이기에 풀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창l3:10). 그러자 아브람과 롯의 목동들은 누가 자기 가축을 먹일 초장을 차지 할 것인가를 놓고 매일 같이 다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카나안인들과 프리스인도 살고 있었습니다. 0 그래서 7-8절에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고, 또 그 당시 그 땅에는 카나안 인과 프리스인도 거하더라. 그러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기를“내가 부탁하건대, 우리가 형제간이니, 나와 너 사이에 와 나의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 다투지 않게 하자.]고 말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카나안인들과 프리스인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웃들이 보는 앞에서, 집안싸움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었다면, 무식하게 싸우지 말고 품위 있게 싸워야 합니다.
0 품위 있게 싸우려면,1, 싸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거나, 싸우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이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창13:7-8) 2. 품위 있게 싸우려면,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거나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하면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잠25:9). 3. 품위 있게 싸우려면, 싸워도 죄를 짓지 말고, 싸움의 분노를 하루를 넘겨서는 안 됩니다.(엡4:26). 4. 그리고 싸우고 난 다음은 반드시 자백을 통해 주의 피로써 깨끗하게 씻기 움을 받아야 합니다.(요일1:9). 5. 그리고 나서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막9:50)
0 이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브람처럼 싸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9절에서 [내가 부탁하노니, 나에게서 갈라져 나가라]고 말합니다. 0 그러면서 아브람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롯에게 먼저 선택할 권리를 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수많은 가축 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더 넓고 풀이 많고 물이 충분한 장소가 필요한 시점에서 선택할 권한이 자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권한을 양보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아브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0 다시 l0-13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의 온 평지를 바라보니, 소알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나 물이 넉넉하더라. 그곳은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으니,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더라. 11 그리하여 롯이 요단의 온 평지를 택하고 롯이 동쪽으로 옮겨가니, 그들이 서로에게서 갈라서더라. 12 아브람은 카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의 성읍들에 거하여 자기 장막을 소돔을 향해서 쳤더라.13 그러나 소돔 인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 고 말씀합니다.
0 10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바라보니,]라고 말씀 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롯은“눈을 들어 바라봤습니다.”그리고 롯이 바라본 그곳은 마치 [주의 동산 같다]고 말합니다. 주의 동산은“에덴동산”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이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은 창2:10-15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2:10-15절을 읽어봅시다.[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가 그 동산을 적시고 그곳으로부터 갈라져서 네 원천이 되었으니,11첫 번째의 이름은 피손인데 금이 있는 하윌라의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좋고, 그곳에는 델리엄과 얼룩마노도 있더라.13두 번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에디오피아의 온 땅을 둘렀더라.14세 번째 강의 이름은 힛데켈이라.그것은 앗시리아 동편으로 흐르더라. 네 번째 강은 유프라테스더라.15 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관리하고 지키게 하시더라.]
0 지금 롯이 바라보는 소돔과 고모라는, 한마디로“지상낙원”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당시 소돔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는지, 얼마나 소돔 땅이 옥토의 땅인지를, 우리는 충분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롯은 그곳을 지금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소알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나 물이 넉넉하더라.]고 말함. 이[소알](히브리어“작은”)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는“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성읍들이“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당시, (다섯 도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도시였습니다.그런데 창3장을 보면“이브”도 주의동산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창3:6절에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고 말합니다. 이브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이브”는,“저것은 내 것이다, 나는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불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을 이브는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그들은 죽고 멸망하고 파멸하게 된 것입니다.
0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도 선호하고 좋아하고 설교하고 선전하고 홍보하는 바로“바라봄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나“바라봄의 법칙”의 결과는 한 마디로 “참담한” 것입니다. 그래서“바라봄의 법칙”은,“죽음의 법칙이요, 파멸의 법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법칙은 바로“마귀로부터”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요10:10), 그런데“아브”는 그 사탄으로 인해서 바라봤고, 사탄의 유혹의 달콤한 조언에 따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그 결과로 주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권한과 지위와 명예와 행복을 사탄에게 도적질 당하게 되었고, 그리고 죽고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요10:10)
0 그리고 다시 롯이“눈을 들어”바라본 것입니다. 롯이 바라보게 된 것은 아브람에 의해서 아니요, 하나님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자신 스스로가 바라본 것입니다(10절). 그리고 롯은 자신이 본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ll절), 그리고 자신이 바라본 것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그곳을 행해 자신의 장막을 쳤던 것입니다.(l2절), 그리고 롯은 자신이 바라본 것을 마침내 얻게 된 것입니다. 사실 롯이 소돔 성을 바라보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소돔 성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생각이 바뀌어 지고, 그의 인생관이 바꿔진 것입니다.
0 롯이 소돔 성을 바라보는 순간, 롯의 마음에는 소돔 성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따분하고, 지루하고 매일매일 가축 떼나 돌보면서,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고, 밤이면 밤하늘의 별들만 바라보는 그런 유목민의 삶을 청산하고, 근사한 도시인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문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 밤이고 낮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그 소돔성에 들어가 살기를 바라고 소원하면서 그 소돔을 향해 장막을 치고, 밤이고 낮이고 그곳, 소돔 성을 바라보면서“나는 반드시 저 소돔성에 들어가 차원 높은 삶을 살 것이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마침내 롯은 그 소돔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롯이 바라던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0 룻기에 보면, 진리의 지식으로 충만한 말씀의 집(빵집)인 베들레헴을 떠나, 거짓교리로 충만한 모압으로 들어갔던 나오미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그는 호된 시련을 겪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모압에 들어 온지 얼마 있지 않아 남편이 시름시름 하더니 죽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있다가는 이제는 큰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있다가는 작은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비로소 지금 것 자신이 지금 잘못된 곳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즉시 진리의 지식으로 충만한 말씀의 집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룻1장)
0 하지만, 소돔성에 들어간 롯은 그곳으로 들어가자마자, 무엇을 하든지 잘 되고 형통합니다. 소돔성에 들어온 롯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소돔성은 자신을 위해서 주께서 마련하신 축복의 동산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소돔성에 들어온 롯은 몇 년도 안 되어서 소돔에서 크게 성공을 한 사람으로, 많은 재물을 얻은 자산가로, 그리고 명예와 권세까지도 얻어 소돔“성문”의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창19:1). 롯은 자신이 소돔성에 들어온 것은 절대적으로 축복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입니다.
0 13절에 [그러나 소돔 인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고 말씀 합니다. 소돔성은 참으로 역겨운 도시었고, 밥맛 떨어지는 도시었으며, 극심한 죄인들의 소굴이었다는 말입니다.“주께서 보실 때 그렇다는”말입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에게는 소돔은 아주 살만 나는 도시었고,“아름다운 도시”요,“예술의 도시”요,“문화의 도시”요, 24시간 생동감이 넘치는“번영하는 대도시”로서 대단히 활기찬 그런 도시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주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 도시는,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 한 마리까지도 남김없이 모조리 불태워 버려야할 악한 것들뿐이었습니다. 소돔의 밤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거룩하신 주 하나님에게는 눈을 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더러운 일들만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0 소돔과 고모라에서 행하는 일들은 짐승이 하는 짓인지, 사람이 하는 짓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그것도 매우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0 그래서 [소돔인 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돔 성에는“르파인”도 있었습니다.(창14:5) 르파인들은, 창세기 6장에서처럼, 처음 처소를 떠난 자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면 누구를 불문하고 농락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의 거주자들은 하나같이 이들에게“자신들을 음행”에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1: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또 그 같은 방식을 따르는 그 주위의 성읍들까지도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주어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한 본보기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도시 전체가 완전하게 음행에 빠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이었습니다. 0 그래서 당시 소돔에서“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즐기는 보통의 여흥이었고, 누구에게나 다 용납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소돔에서 이것은 가장 흔하게 즐기는 유행이었던 것입니다. 0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창6:6절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0 그뿐 아니라 소돔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하면서도 소득이 넘쳐났습니다. 0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곳에서 매우 풍족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소돔 성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로움과 부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일을 해도 수확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마치 이집트의 7년 풍년의 때와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소돔성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놀고 음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문화이고, 그것은 하나의“행위예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것을“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만약, 누가 자신들의 행동을 악하다고 말하거나 자신들의 행동을 지적이라도 한다면, 그것은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되고 상대방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사람들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고, 그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창19:9)
0 그런데 롯은 이런 주의 동산 같은 풍요로운 소돔의 도시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세련되고 품격 높은 삶을 누리며 날마다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롯은 소돔이 잘못된 곳이라는 것은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롯은 그곳을 떠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자신은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고, 부자 되는 기술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롯은 잘못되고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 철저하게 길들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롯은 그곳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죄를 이기고, 죄를 책망하고, 악에서 떠나고, 죄에서 떠나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저 위를 바라보고, 위에 것들을 구하고, 성도들의 휴거들을 소망하며, 주 오심을 기다려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단 한 번도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권고를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0 롯이 거기서 배운 것은 단지“이익이 경건”이라는 것만을 배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고, 부자로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부자로 사는 것이 승리의 삶이요, 그리고 가난은“저주”라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거짓이요, 사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고 조롱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의 고객들의 주머니를 털어가기 위한 상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롯은 그곳에서 빠져 나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딤전6:5절에서 젊은 사역자에게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고 아주 강력한 경고를 주게 된 것입니다. 만약 롯의 배운“이익이 경건이고, 가난은 저주”라는 그 교리가 진리였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도 저주 받은 사람이고,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저주 받은 자들이요, 사도바울도 저주를 받은 자요, 초대교회 성도들도 모두 저주를 받은 자들이요, 오직 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환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도 모두 저주받은 자들일 것입니다.
0 그러나 롯이 배운 그 바라봄의 법칙은 신앙이 아닙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믿음이 아닙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사이비 종교인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인간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마귀로부터 온, 파멸의 법칙이요, 죽음의 법칙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악들을 대표하는“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2:16절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리석은 목사들은 이 세상의 대표적인 세 가지 죄악 중, 그“두 번째 죄악”인 이“안목의 정욕”을,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받은 비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전하고, 설교하며, 가르치면서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면서 교세확장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0 그래서 그들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거짓 부흥을,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부흥으로 착각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자신들의 그 더러운 이름석자 휘 날이며 유명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부흥이 아니고, 부흥은 큰 교회를 짓는 것이 부흥이 아니고, 부흥은 유명하게 되는 것이 부흥이 아닙니다. 참된 부흥은 내 마음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참된 진리의 지식을 깨닫고, 주 하나님을 성경대로 바로 섬기는 것이 바로 참된 부흥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참된 부흥을 이룬 사람은,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오직 주님과만 일치하며, 그래서 참된 부흥은 아브람처럼 자신은 전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고, 자신은 아무런 생각조차 여기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부흥을 이룬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람처럼 성경의 토대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0 롯은, 아브람과 오래토록 있으면서도 그러나 아브람의 바른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아브람의 신앙을 속으로 우습게 여기고, 곁길로 나가 여의도에 가서 헛된 신앙, 헛된 믿음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롯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그“바라봄의 법칙”에 따라“안목의 정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후, 그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이 바라봄의 법칙을 이용해서 아담과 이브를 파멸시키고,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간사하고 사악한 이 마귀는 또 다시 이“바라봄의 법칙”을 내세워 마지막 아담인 주 예수그리스도를 유혹하려고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마4:8-10절에서 주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마귀는 주를 아주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주께 보여 주며 9 말하기를“네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너에게 주리라.”고 하더라.10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너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하였느니라.”하시니, ]그렇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마귀가 제시하는 그 바라봄의 법칙에 걸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인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마귀는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O 다시 l4-18절에[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진 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15 이는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네게 줄 것이며, 네 씨에게 영원히 주고 16 내가 네 씨를 땅의 티끌 같게 할 것임이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씨도 셀 수 있으리라. 17 일어나서 그 땅을 가로와 세로로 걸으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음이라.”하시더라.18 그때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평지에 와서 거하며, 그곳에서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말씀합니다. 롯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요단의 온 평지과...물이 넉넉하며...주의 동산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10절) 그리고 롯은 그곳에서 크게 성공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바라본 것을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따라갔고, 롯은 자신이 보이는 대로 말했으며, 롯은 자신이 보이는 대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0 그리고 이제 아브람이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다른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하는데도, 아브람은“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모든 것은 전능자의 손에 의해서, 모든 것은 전능자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은 전능자의 말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아브람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보이는 대로 따라가지 않았고, 보이는 대로 말하지 않았고, 보이는 대로 결정하지 않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모든 삶과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오직 그분의 말씀만 따라갔던 것입니다. 0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무엇인가를 이루려고“자기 스스로”바라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삶의 원칙의 첫 번째 조건은,“전능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그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 주시고, 그들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진리의 지식을“의심 없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0 그리고 마침내 주께서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바라보라]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 대해서 큰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네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너는 저것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너에게 그대로 이루질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기대하면서 매일 같이 외치라”는 것이 아니라,“내가 너를 향해 가지고 있는 내 계획을 보라”는 것입니다. 0 그러니“너는 안심하고 내 말에 순종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가능한 한 많은 땅을 아브람에게 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을 통해서 한 나라를 세우고, 한 민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요단의 평지”를 포함하여 전 팔레스타인 땅을 아브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105:8-11절에 [그가 자기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이는 그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그의 맹세요 10 또 같은 것을 야곱에게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확증하셨으니“내가 네게 카나안 땅, 곧 너희 유업의 몫을 주리라.”하셨도다.]고 말씀하십니다.
0 그래서 중동문제, 아랍 문제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완전하게 해결된 사건입니다. 이 땅은 아주 오래전에 이 땅의 소유주께서 야곱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창2l:10).그러나 인간들은 이 땅을 놓고 아주 많은 잔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이런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스라엘 역사는 모세가 B.C.1400년에 기록한 그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7-18절에 [일어나서 그 땅을 가로와 세로로 걸으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음이라.”하시더라. 18 그때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평지에 와서 거하며, 그곳에서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18절[아브람이 장막을 옮겨...그곳에서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주를 예배하기를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주의 음성을 듣기를 기뻐했습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섯 번이나 주께 제단을 쌓던 것입니다.(창12:7.8,13:4,18,21:33,22:9) 그래서 아브람의 예배는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0 주께 드려질 때마다 응답과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횟수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 구차한 예배, 반갑지 않는 예배를 하루에 천 번을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헛된 예배인 것입니다. 주께 우리의 마음이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내 혼과, 내 생각을 다해서, 영과 진리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라면, 그 예배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하게, 아무리 그럴듯하게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800명의 거짓 성도, 800명의 거짓 목사, 8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날 뛰며 요란 법석을 떨던 칼멜산“바알의 교회”의 거짓 예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0 그러나 같은‘산’이라 할지라도, 설령“엘리야 교회”의 예배에서는, 풍악을 울리는 오케스트라도 없었고, 잘 꾸며 놓은 강단도 없었으며 노래 부르는 찬양대도 없고, 성도라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을지라도, 그러나 그 예배는 오직 성경을 토대한 진리지식 위해 오직 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위에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해서 영과 진리로 주께 드렸던 예배였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강력한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내가 드리는 예배는 바로 이런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 말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지 말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지 말고, 오히려 눈을 감고,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0 그런 사람은 결코 쓸쓸하지 아니할 것이고, 그런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까지 주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며 그 시간을 매우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씀으로 모두 다 같이 말씀을 들을지라도, 그러나 그 주님의 말씀은 각 사람마다 다 각기 개별적으로 주시는 말씀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내 마음과, 내 혼과, 내 생각을 다해서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기면서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형식도 순서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예배는 아브람과 엘리야처럼 혼자 산에서도 드릴 수 있고, 룻과 나오미처럼, 둘이 길을 걸으면서도 드릴 수 있으며(롯1:15-18), 백부장 코넬료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서도 드릴 수 있고(행10:33), 빌립과 이디오피아 여왕 칸다케처럼(행8:35), 달리는 차 안에서도 드릴 수가 있고, 엘리야과 엘리사처럼 일하면서(왕상19:19-21) 드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0 왜냐하면, 내가 어디에 있든, 주께 내 마음을 다하고 내 혼을 다하고 내 생각을 다해서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기는 자세로 아브람처럼, 엘리야처럼 주를 부르며 주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주님의 응답이 있고 주님의 영광이 있고 주님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거기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계시를 받을 수가 있고, 거기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으며, 거기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으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셨다가, 주 예수의 날,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영원히 주와 함께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