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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박종각 2021. 12. 5. 00:00

                                                     주일 예배

                                                      12월5일

                                    헤롯이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서

                                                      주일 예배

                                                       12월5일

                                    헤롯이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서

 

                                            행12:1-25절 말씀입니다.

 

O 먼저 행12:1-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그 무렵에 헤롯 왕이 교회에서 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치더니,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 3 그 일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한 것을 알고서 그가 베드로도 잡고자 하더라.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4 그가 베드로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네 조의 병사들을 붙여 교대로 지키게 하니 이스터가 지나면 그를 백성들 앞에 끌어낼 의도였더라. 5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하더라. 6 헤롯이 그를 끌어내려고 한 그 날 밤, 베드로는 두 병사 사이에서 두 쇠사슬에 묶인 채 자고 있었고 또 간수들은 문 앞에서 감옥을 지키고 있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O 본문1-2절에 [그 무렵에 헤롯 왕이 교회에서 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치더니,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고 하십니다. 행l2장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중심인물로 나오는 마지막 장입니다. 여기서부터 성령께서는 초점을 베드로에게서 바울로 옮기십니다. 그리고 사도 야고보는 본문 2절을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성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O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1장에 보면, 그동안 마치 주님의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처럼 주를 따라 다녔던 유다 이스카리옷이 죽었을 때는 그 자리를 맛디아 (행1:26)로, 그 자리가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행동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는 사도가 아닌, “마귀”(요6:70)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죽었을 때는 그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 되지 않았습니다.

 

O 왜냐하면, 사도직은, 그 자리가 비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직은 그 사람 이름으로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21:14절에 [또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자, 그 일이 유대인들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을 알고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다시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의 명절인“이스터”가 지나갈 때까지 무장한 16명의 군인들로 한 조에 네 명씩, 모두 네 조로 나누어서 베드로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임에도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혀 가시던 그 밤에도 잠을 잤었습니다. 그래서 마26:40-41절에 [제자들에게 돌아와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잠에서 깨우시고 다시 나가 기도하시고 돌아왔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잠을 잘 때가 아니었고, 잠을 자서도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때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들을 위해인 것입니다.

 

 

 

O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 기도하지 못했던 그들은 모두 시험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26:69-74절에 보면 그때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는 부인했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베드로와 주님과는 결코 모르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생업도, 가족도, 모든 것을 다 버리면서까지(마19:27),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3년씩이나 알지도 못하는 그 예수를 따라 다닌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예수님께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6장을 보면, 한번은 주께서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진실로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고 말씀하시자마자, 많은 사람들, 많은 제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듯 주를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이때 주께서 열두 제자들에게“너희도 가려느냐?”고 (요6:67) 묻자, 이때 즉각적으로 베드로는“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들이 있나이다.”(요6:68) 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마16:15-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께서는“주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O 그러나 이런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그것도 총칼 앞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극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겨우 심부름 하는 작은 하녀에게 부인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 장소에서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맹세하고, 그리고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마26:72,74).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깨어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자게 되면, 시험이 올 때,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또 다시 잠을 잡니다. 그것도 내일 아침이면 죽을 그날 밤에, 그것도 두 쇠사슬에 매인 상태로 그리고 자신의 양쪽 편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그 두 명의 군사 틈에 끼어서 자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상황이 바울이었다면, 바울은 결코 잠을 자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처형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밤에 자신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빌1:12-13).

 

O 하지만, 베드로는, 그 밤이 지나면, 형장으로 끌려 나가 야고보처럼 참수를 당하게 되는 바로 그 밤에 마치 자기 집 안방인 것처럼 코를 콜 면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행스러운 것은, 베드로가 잠을 잤을지라도 시험에 걸리지도 않았고, 주를 부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잠은, 베드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주께 맡길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베드로는 죽음을 눈앞에 둔 극히 불안한 상황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 그 반대였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오히려 주님의 은혜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주를 앞질러 나서거나, 그렇다고 낙심되어 뒤로 처지는 그런 자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일은 주께서 주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는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옥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나가든 들어왔든,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상황에서 죽으면 죽는 대로 좋고, 살면 사는 대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주님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주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분을 향한 신뢰입니다.

 

 

 

O 그리고 그로 인한 편안한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게신 하나님의아들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신이 섬기는 그 주께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잠을 잤을지라도 주를 배반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이스터가 지나면]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이스터”는, [무교절 기간] 에 있었습니다.(3절). 이것은 유월절을 단수로서의 말할 때 말하는 그“무교절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 것은 유월절을, 하나의 단수로 말할 때, 유월절을 무교절이라도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 날들의 “무교절 기간”을 지킬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은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22:7절에 [그때 유월절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이 되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또 마26:17절에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우리가 주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수실 자리를 어디에 마련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무교절 기간”은, 유월절을 단수로 말하는 그런 무교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레23:5)은 이미 지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칠일 간”을 지키는 “무교절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 달 십사일 저녁은 유월절이고, 그 다음 날 15일부터 칠일 간, 무교절 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O 이 기간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칠일 동안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교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누룩 없는 빵은, 십사일 저녁 유월절부터 먹습니다. 그래서 레23:5-6절에 [첫째 달 십사일 저녁은 주의 유월절이니라. 같은 달 십오일은 주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출12:15-18절에 보면 [칠 일간을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지니, 첫날부터 너희 집들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라. 이는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 16 첫날에 성회가 있으며 일곱째 날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있으리니 이 두 날에는 각자가 먹어야 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형태의 일도 해서는 안 되나니 그 일만이 너희가 할 일이니라. 17 또 너희는 무교절을 지켜야 하리니 이는 바로 그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영원히 율례로 삼아 너희 대대로 이날을 지킬지니라. 18 첫째 달, 그 달의 십사일 저녁부터 그 달의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O 그래서 이 4절에서 말하는“이스터”는, “무교절”이 아니라, "아쉬 타롯"을, 따라 이름 붙인 이교도들의 축제였습니다.(판2:23,10:6, 삼상7:3, 왕상11:5, 왕하23:13절), 이 [이스터]의 이 절기는, 예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에 바빌론에서 지켰던 이교도의 명절입니다. 그리고 “이스터”는, 로마의 휴일인 것입니다. 헤롯은 종교적으로 이 명절을 아주 열심히 지켰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헤롯은 로마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돔,이두메인)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에 전해진 바알과 태양신 숭배 예식을 12월 25일 날, “원형 경기장” 에서 행했습니다. 12월 25일은, 바알의 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에서도 마찬가지로 12월25일에 바알의 생일예식을 성대하게 행했습니다. O 그런데 창녀 로마 카톨릭은, 이방의 신인 바알과 태양신의 생일인 12월 25일을 가져와서, 이날에 “예수가 탄생”한 날로 정하고 성대하게 예식을 행합니다. 아주 지독한 거짓이요 사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들도, 로마 카톨릭이 하는 대로 따라서 12월25일을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 이라고 정하고, 그날 성대한 기념식을 같고, 예수께서 오신 이 날에 “주께 감사하라”고 돈을 거둬 드립니다.

 

 

 

O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이 바빌론의 명절인 ‘이스터’ 가지고 와서 “무교절”을, 이교도의 절기인“이스터”라는 이름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을 “이스터”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교절 절기는, 이 이교도의 절기인“이스터”와, 몇 년마다 같은 시기에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3절에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절에 [교회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그 내용은 우리가 정확히 모르지만, 그러나 전에 베드로가 심부름하는 하녀에게까지 주를 부인한 것을 감안 한다면, 그들의 기도 내용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또다시 주를 부인하지 않고 담대히 죽음을 대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베드로를 위한 기도모임은, 이 내용으로 열심히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O 헤롯은 베드로로 하여금 주를 부인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명절이 지나가면 백성들 앞에 끌러내 베드로를 죽이려고 명씩 네 조인 16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습니다. 6절에 보면, 그들 중 둘은 베드로와 함께 묶여 있었으며 더욱 안전을 기하기 위해“간수들”을, “문 앞에”배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구원은 주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21:31절에 보면, [전쟁의 날을 위하여 말이 예비 되어도,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O 다시 7-11절에[보라,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니 감옥 안에 빛이 비치더라. 또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일으켜 말하기를“급히 일어나라.”고 하니 쇠사슬들이 손에서 벗겨지더라. 그 천사가 그에게 말하기를“띠를 두르고 네 신을 매라.”하기에 그가 그렇게 하고 또 그에게 말하기를“네 겉옷을 걸치고 나를 따르라.”하니 그가 나가서 그를 따라가면서도 천사가 하는 일이 현실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 줄로 생각하더라. 그들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경비병을 통과하여 성읍으로 통하는 철문 앞에 당도하니 문이 저절로 열린지라, 그들이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자, 곧 그 천사가 그에게서 떠나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말하기를“이제 내가 확실히 알았노니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나를 구해 내셨도다.”라고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O 7절에 보면, 주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베드로를 깨우기 위해 베드로의 옆구리를 처서 베드로를 깨운 천사는, 베드로의 손과 발에 감긴 쇠사슬을 풀어 주고(7절). 그에게 옷을 입게 한 후 (8절) 첫 번째와 두 번째 경비병을 통과하여 성읍으로 통하는 철문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굳게 닫친 철문은 자동으로 열립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성읍 밖, 한 거리로 인도한 천사는 사라졌습니다.(10절). 그때서야 베드로는 정신이 나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꿈도, 환상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의 구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1) 죄인은 마귀의 올무에 묶여 있고, 마귀에 의해 포위되어 있으며, 마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2:26절에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O 2) 그리고 죄인은 베드로처럼“죄인의 감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4:18절에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심이라.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케 하시며,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짓밟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고]라고 말씀하십니다.3) 죄인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잠이 들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4절에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4) 죄인은, 악에 묶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5:22절에 [악인은 자기 자신의 악들에 걸리며 자기 죄들의 줄들에 매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O 5) 죄인은, 죽기로 정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히2:15절에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6) 그러기에 죄인은, 빛과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42:6-7절에 [나 주가 의로 너를 불렀으니 내가 네 손을 붙들고 너를 지킬 것이며,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들의 빛으로 너를 주어 7 앞 못 보는 눈들을 뜨게 하며, 감옥에서 갇힌 자들을 이끌어 내며 암흑 속에 앉은 자들을 감옥에서 이끌어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O 7) 그리고 구원은, 즉각적으로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일으켜 말하기를“급히 일어나라.”고 하니 쇠사슬들이 손에서 벗겨지더라.]고 말씀하십니다. 8) 그런 후에 그는, 하나님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그 천사가 그에게 말하기를“띠를 두르고 네 신을 매라.”하기에 그가 그렇게 하고 또 그에게 말하기를 “네 겉옷을 걸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9) 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러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말하기를“이제 내가 확실히 알았노니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나를 구해 내셨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로 가서 그것에 관해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그가 그 일을 생각하며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 오니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더라.]고 말합니다.

 

O 다시12-19절에 [그가 그 일을 생각하며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 오니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가 현관문을 두드리니 로데라고 이름하는 한 소녀가 들으려고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것을 알고 기뻐서 현관문을 열지 않은 채 뛰어들어가 현관 앞에 베드로가 서 있다고 말하니 그들이 소녀에게 말하기를“네가 미쳤다.”고 하더라. 그래도 그녀가 사실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니 그들이 말하기를“그것은 그의 천사라.”고 하더라. 베드로가 계속 문을 두드리니 그들이 문을 열고 베드로를 보자 놀라더라. 그러나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으로 잠잠하게 하고 주께서 어떻게 자기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셨는가를 그들에게 설명하고 또 말하기를“가서, 이 일을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말해 주라.”하고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8 날이 새자마자 병사들 가운데는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더라. 19 그때 헤롯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간수들을 심문하고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더라. 그후 그는 유대를 떠나 카이사랴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머무르더라.]고 말씀합니다.

 

 

 

O 12절에 보면, 이 기도의 모임은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 모였습니다. 이 집은, 당시 기도모임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곧장 이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모두 여섯 명이 나옵니다. 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마1:16) 2) 막달라 마리아(마27:56). 3) 베다니의 마리아,(요11:1). 4) 클로파의 아내 마리아(요19:25). 5)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막6:3). 6)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모친 마리아(행12:12)입니다. 이들은 모두 베드로의 믿음 없음을 걱정한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고보처럼, 베드로도 죽을 것을 당연히 여기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가 마26:74절에서 주를 부인한 것처럼, 부인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3-14절에 보면, [베드로가 현관문을 계속 두드리니]라는“로데”라는 소녀가 문을 열기 위해서 나왔다가 그것이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너무 기쁜 나머지 현관문을 열지 않고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베드로가 서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도모임의 사람들의 반응은 15절에서 [네가 미쳤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떤 응답이 왓을 때 이것은 자신이 기도한 데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든가, 그 응답에 냉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O 그래도“로데”가 사실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자, 그들은 그렇다면,“그것은 그의 천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문을 열고 베드로를 보자 놀라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O 여기 기도모임에 사람들은, 야고보가 참수를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도, 야고보와 같이“참수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모임 사람들은, 베드로도 야고보와 같이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돌아온 것입니다.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그 감옥에서 돌아온 것입니다.

 

O 그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은, 베드로를 보는 순간, 그들의 가슴이 철렁 하면서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잡혀 들어간 감옥은 베드로가 죽어야만 나올 수 있는 감옥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곳에서 베드로가 살아 돌아 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을 부인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한 기도모임은 베드로도 야고보처럼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를 하기를 바라며 담대하게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베드로가 돌아 왔으니, 그렇다면, 이번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부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모임의 사람들은 17절에서 베드로가 주께서 어떻게 자기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셨는가 하는 설명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안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일을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말해 주라.”말한 후에 곧장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열두 제자 중에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두 명 있는데, 하나는, 본문 2절에서 나오는 야고보로, 야고보서를 기록하고 이미 순교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마10:2)와 그다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일을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말해 주라고 말한 야고보는, 바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20-25절에 [헤롯이 투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엽게 생각하였는데도 그들은 하나가 되어 그에게 와서 왕의 침소를 맡은 블라스토를 그들의 친구로 삼아 화친을 간청하니 이는 그들의 지방이 왕의 영토에서 나는 식량으로 살기 때문이라. 그리하여 어느 정한 날에 헤롯이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서 그들에게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외치기를“저것은 신의 음성이지 사람의 음성이 아니다.”라고 하니 그때 즉시 주의 천사가 그를 치더라. 이는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그리하여 벌레들이 그를 먹으니 그가 숨을 거두더라.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고 번성하더라. 그때 바나바와 사울이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는데 마가라고 하는 요한도 데리고 왔더라.]고 말씀합니다.

 

O 20절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아그립파 1세입니다. 성경에서 [헤롯](마2장,눅9장)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이름은 성경을 거부하며, 유대인을 멸시하고, 진리를 미워하는, 정치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헤롯이 투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했습니다. 그것은 헤롯의 정부에 대한 투로와, 시돈 거주민들의 행패 때문이었습니다. 투로와 시돈 사람들은 마치 점령군들이 주둔지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그들의 거주지에서 행하는 행동 때문에 헤롯은 항상 그들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감정을 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땅에서 나는 식량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마5:25) 헤롯은 그들과 화친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과 가까운 사람 블라스토를 매수해서 특정한 날을 정하여 환영 기념식을 열고, 투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들을 초청해 놓고 그리고 헤롯은 아주 멋지게 차려입고서 그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합니다.

 

O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그때 사람들이 외치기를“저것은 신의 음성이지 사람의 음성이 아닙니다.”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자 헤롯은 우쭐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던지는 찬사에 깊이 빠져들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착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찬사를 받는다거나, 찬양을 받는 다거나, 영광을 받은 다거나, 하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리는, 그가 어떤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영광을 받을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특히 찬사와, 찬송과, 찬양과, 영광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댓 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므로 자신의 생명의 댓 가를 치렀습니다.

 

 

 

O 그래서 민20:10-12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바위 앞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말하기를“패역한 너희는 이제 들으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에게 물을 나오게 해야만 하겠느냐?”하고, 11 모세가 손을 들어 자기 막대기로 그 바위를 두 번 쳤더니, 물이 풍부하게 솟아 나와서, 회중이 마시고 그들의 짐승들도 마셨더라. 12 그러자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O 물은, 모세가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가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에게 물을 나오게 해야만 하겠느냐?”고 소리를 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물론,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영광을 자신들의 것으로 빼 돌립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속으로는, 모두 자기 것으로 착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의 겉껍질만 돌리고, 알맹이는 모두 자신들이 가져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매우 혹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O 24절에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고 번성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말씀”이,“성장”하고“번성”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강력하며 양날이 있는 칼보다도 더 날카롭기 때문에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며, 망치이며, 막대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들과 땅이 맹렬한 열로 녹아내릴 때까지 열매를 맺게 될 썩지 않는 생명의 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0 그래서 살전2:13절에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O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2:9절에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매여서까지 고난을 받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매어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은 그 무엇이도 매이지 않고 계속 번성하고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0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그 말씀은 우리를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제대로 들어오기만 하면, 이 말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O 이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장과 번성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인격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성장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살아있는 이 생명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매이지 않고, 역사하시는 이 생명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므로 죽은 영을 살려내는 삶을 사시다가 예수의 날, 그리스도의 날,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해서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영원히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