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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박종각 2018. 9. 16. 02:07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주    일    예    배
                                         롬11:1-16절 말씀입니다. 


[1그렇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라.2하나님께서 미리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 너희는 성경이 엘리야에 관하여 말한 것을 모르느냐? 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하여 중보하여 말씀드리기를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나의 생명을 찾고 있나이다.”하니 4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의 형상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었노라.” 하셨느니라.5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7그러면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선택된 자들이 그것을 얻었으며 그나머지는 오늘까지 완고해졌느니라. 8(기록된 바와 같으니“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노라.”하였느니라.) 9또 다윗이 말하기를“그들의 식탁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 10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이 항상 굽혀지게 하소서.” 하였느니라. 11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졌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그들의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로  시기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들의 실족함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쇠퇴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어떠하겠느냐?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들의 사도이기에 나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나니 14이는 아무쪼록 내가 나의 동족을 시기 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라도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16 첫 열매가 거룩하면  빵 덩어리도 거룩하고  또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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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본문 1 절에 [그렇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이스라엘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자기 백성]이라고  특별히 말할 경우에는 적어도 99%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그런데 지금 성경이 하시는 말씀은[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이스라엘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이러한 바울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버리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회심하고 구원받은 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바울은구약의 율법에 따라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신약 적 구원계획에 따라[개인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신약 시대, 구약의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시대에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고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교회],즉 “그리스도인”라는 특별부류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코[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이방인의 때가 서서히 끝나 감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과 회복에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O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일시적으로 손을 떼시고, 잠시 외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들을 제거하시고,그들을 민족적으로 구원하셔서 그들의 본래 자리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을 회복시키는 이 일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O 1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두고[나도 이스라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갈2:15절에서는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라고 또, 말합니다.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이스라엘인]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을[유대인]이라고 말하는가? 에 대해서 억지로 구분합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해서 사울 왕을 거쳐,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까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자신의 죄에서 돌아서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네 나라를 찢어 네 신하에게 주리라]고 말씀 하시고,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을, 남쪽과 북쪽으로 찢어 하나의 국가를, 둘로 갈라지게 하신 것입니다.(왕상\11장)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 두파 중에서,[열 지파]는, 북쪽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남쪽에는 열 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 즉,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유다]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이스라엘을, 지역적으로 구분해서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면, 북쪽 왕국에 있는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고 또, [유대인]이라고 하면, [남쪽 왕국] 에 있는 [유다 족속]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그래서 갈2:14절에 보면, 바울은 베드로에게 [너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살지 아니하고 이방인들의 방식을 따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느냐?]고 말합니다. 지역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는 사마리아 북쪽 갈릴리의 벳세다  출신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역 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유대인이 아니라, 분명히 [이스라엘인]입니다.





O 그런데 바울은 사마리아 북쪽 갈릴리의 벳세다 출신 베드로를 보고, [너는 유대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유다의 베냐민] 출신인, 자신을 가리켜서는 나는 [이스라엘인]이라고, 본문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 왕국, 남 왕국] 이라는 지역적인 것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족속]이라면, 그들 모두는 이스라엘이 되고, 유대인들이 되기 때문에, 그들을 지역적 구분 없이,상황에 따라서 그들을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든,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2-3절에[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 너희는 성경이 엘리야에 관하여 말한 것을 모르느냐?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하여 중보 하여 말씀드리기를,]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엘리야의 중보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엘리야의 이 [중보]는, 중보 같지 않은 매우 이상한 중보입니다. 왜냐하면, 중보라면,그들을 위해서 좋게 말해주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변호하는 중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나  엘리야의 중보는 오히려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잘못을 낱낱이 고자질하고 비난하므로 이스라엘을  불리하게 하는 중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나의 생명을 찾고 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왕상19:10절과, 14절의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이 겁나 도망하여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에 자기 종을 남겨두고서 자신은 광야로 하룻길이나 더 가서, 향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며 [주여,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고 부르짖다가 지쳐서 쓰러져 잠이 듭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를 깨우고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 먹입니다.



O 이렇게 해서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다시 밤낮 40일을 걸어서 호렙 산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리고 호렙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어느 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굴속에 들어 앉아 있던 그에게[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옵니다.(왕상19:1-9)그때 엘리야는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중보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O 그래서 왕상19:10-15절에 보면[그가 말하기를 "내가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음이니이다. 나,오직 나만이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도 앗아가려고 찾고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대답이 바로 오늘 본문 4-5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의 형상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었노라.”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배반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1절부터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 대해서 시기심이 생기도록 하셨고,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진노를 일으키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시기와 진노에 대하여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진노로써 그들에게 보응하셨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엄청난 곤욕으로 댓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0:9절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5절에 [지금도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던 것과 같이 [지금도] 이스라엘 중에는 [남은 자]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지금]이란, 바울이 살고 있던 바로 그 시대를 말합니다.





O 그리고 바울 시대의[남은 자]들이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주구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그 [남은 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중, 이처럼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하심]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O 6-7절에[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

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구하

는 그것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선택된 자들이 그것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는 오늘까지 완고해졌느

니라.]고 말씀합니다. O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혜

로 된 것이 뿐, 행위로 된 것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엇이든지 행위의 결과로 된 것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위로 된 것이지, 은혜로 된 것 일수는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들이  죄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을 뿐, 우리 자신의 죄들을 씻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한 행위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지, 우리들의 행위의 결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가 행위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반대로  은혜가 은혜일수 없도록  만드는 것

이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행위는 같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것은 당연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단위로서는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

습니다.


O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이 개별적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개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개별적으로 구원받아, 그들은 물론 본성으로는 유대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 즉,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여전히 완고해져 구원받지 못한 민족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 단위로 볼 때는 유대인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민족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O 8절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노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바울은 여기서 다시 사29:10절의 말씀을 다시 인용해서 말합니다. 사29:10절을 보면[이는 주께서 깊은 잠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게 하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 치리 자들과, 선견자들을 가리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관심 하는 것으로 그냥 내버려 두신것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셨는데, 그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에게 혼미한 영을 주셔서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고, 눈으로 보고,귀로 듣는 능력을 다 빼앗아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눈이 있어 보기는 보아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고, 귀가 있어 듣기는 들어도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깨닫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고, 갖지 않은 자에게는 아예 있는 것, 마저도 빼앗으시는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9-10절에  [또 다윗이 말하기를  “그들의 식탁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이 항상 굽혀지게 하소서.”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다시 시69:22-23절의 다윗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다윗은[그들의 식탁이 그들 앞에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허리는 계속해서 떨리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렸던 중보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더 지독하게  대적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불리하

게 말씀을 드렸던 다윗의 중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O 그래서 시69:24-28절에서 다윗은 다시 말하기를 [주의 분개를 그들 위에  부으시며, 주의 불같은 진노로 그들을 덮치게 하소서. 그들의 처소로 황폐케 하시고, 그들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하소서...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시어 그들로 주의 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산 자들의 책에서 지워 버리시어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다윗의 중보는, 중보라기보다 저주라고 해야 맞습니다. 행28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만나 자기가 로마에 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기를, 유대인들이 자기를 붙잡아 로마인들 손에 넘겨주었지만, 그러나 로마인들은 자기를 심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 방면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가이샤에게 상소하게 된 것이지, [내 민족을 걸어 고소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은 바울로부터 이것에 대해 좀 더 듣고자 해서 날을 정하고,  바울의 숙소에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강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로써 예수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했습니다.(행28:23).  그리고 바울

의 강론이 끝나자 이때 어떤 사람은 바울의 말을 믿었고, 또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등,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가운데 자리를 떠나갑니다. 이때 장면을 행28:25-28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자리를 뜰 때 바울이 한 마디 부언하기를‘성령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 조

상에게 잘 말씀하셨도다.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라.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 귀는 듣는 데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회심하지도 못하게 되어 나로 그들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


O 여기서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나, 다윗도, 이스라엘에 대적하여 하나님께 중보 했음을  유대인들에게 환기시킨 것입니다.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 대적하는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변호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돌이켜 이방인들에게 향하셨으되, 이것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O 11절에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졌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그들의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로 시기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도처에 말씀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말씀마저도 상실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들 까지도 모조리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을 안 다면 등골이 오싹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사를 낳고, 복은 복을 증대하는 것이며 감사가 없고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는 자는, 원망과 불평만 날로 증가되게 갈수록 삶은 엉망진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빼앗아 버리기 때문에,  영육이 모두 고갈 될 수밖에 없어 결국 그 사람은 마치 사막에 히스 나무같이 되어 좋은 일이  오는 때를 보지 못하고, 광야와 소금 땅과 사람이 살지 않는 바싹 마른 곳들에 거 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드리는 자는, 영육이 더욱 풍성하고,  부요하며,  더욱 충만하게 되어 마치 그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강가에 그 뿌리를 뻗침과 같아서 더위가 와도 걱정하지 않고 그 잎이 푸르러 가뭄의 해에도 염려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도 그치지 아니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O 어떤 사람은, 내가 감사를 할 줄 몰라서 감사를 하지 않느냐,아무리 찾아봐도 감사할 것이 없으니까,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삶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  것입니까? 그래서 원망과 불평을 계속 하다보니까 결국은 감사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칙은 감사가 감사를  불어오고, 원망과 불평은, 원망과 불평을 불러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아무리 찾아 봐도 나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 삶을 속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은 더욱 주께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감사는 그 사람의 삶속에 감사할 일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원망을 그치고, 감사하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12절에 [그들의 실족함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쇠퇴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실족함으로써 이방인들이 세상이 부요하게 되고,  유대인들이 쇠퇴 하게 됨으로써 이방인들이 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요함]은 영적 부요함과 동시에, 물질적 부요까지 포함해서의 [부요함]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돈과 땅이라는 물질적 부요를 약속을 받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대인들이 실족하고 쇠퇴하게 되자,  그 부요는  이방인에

게로 옮겨 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비해 물질적으로 부유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었고 2차 대전 당시만 해도 그러했습니다.독일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수만 수십

만 달러어치의 금괴를 어딘가에 감촉같이 숨겨 두고 있던 자들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굶어 죽거나 가스실에서  처형되어야

했습니다.


O 유대인들은 자신의 물건 값을 절대로 깎아 주는 법이 없고, 또, 다른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때는 절대로 정가대로 사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부요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대인들이 쇠퇴했습니다. 그 대신 이방인들이 부요해 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부유함이 충만함에 따라 이제는 다시 유대인들의 위치를 다시 회복

할 수 있는 전환점에 맞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O 13-14절에 [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들의 사도이기에 나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나니 이는 아무쪼록 내가 나의 동족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라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롬15:16절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말합니다.그래서[이는 나로 이방인들을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이 되게 하시어 하나님의 복음을 수행하게 하심으로써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수 있도록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바로14절에서 말하기를 [이는 아무쪼록  내가 나의  동족을 시기 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 얼마라도 구원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가 된 것을 자랑하는 까닭은 자기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사역함으로써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여] 이방인들을 질투한 나머지 자기네들도 구원받으려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만약 이방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오히려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이 만약 이방인들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심이 생긴 나머지 자기네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게 된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동

일하게 그들에게 베풀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바울에게 도리어 분노하였고,무리를 선동하여 그를 붙잡고는 사람들에게 이 자가 바로  각처에서 백

성과 율법을 거역하여 모든 사람에게 가르친 자인데다가 헬라인들까지 성전으로  데려와서  이 성소

를 더렵혔다, 고  외치며,  바울을  붙들어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행21:27-32). 그래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주장하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눈에는 [나쁜 놈, 사악한 놈, 당장 죽일 놈]으로만 여겨지기만 했던 것입니다.





O 15-16절에[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첫 열매가 거룩하면 빵 덩어리도 거룩하고 또 뿌리가 거룩하면 그가지도 거룩하니라]고 말씀합니다.이스라엘을 버림으로써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유대인들을 버리지 않고 반대로 그들을 받아드린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는 생명이 아니겠느냐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 끝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민족으로서 회복시키시게 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11장의 중심 주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11장은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기회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버리셨던 그 틈을 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자들인 것입니다.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채 그냥 끝나고 마는 것은 절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므로 그들이 아무리 극심한 고통과 시련과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회복 될 것이고, 그들은  다시 아름다운 영광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비리셨던 것은, 단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유대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이방인들에게 하는 말인지, 또는 교회에게,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인지,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이 다르고 이방인이  다르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방인은,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전혀 새로운 특별한 부류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구원받은 사람을  [그리스도인,  교회,  주의 신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주께서 재림 시에 땅에서 주를  맞이하게 되고, 불신자들인 이방인들은 주의 심판으로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에서 죄와 만나기 위해서 이 땅에 대 환란이 임하기 전에 공중으로 이끌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일어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과, 지금 우리가 사는 이때가 어느 때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알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전파를 하는 일입니다. 혼들을 이겨오며, 구령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자식, 지옥의 자식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여러분들의 발 거름이 머무르는 곳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서 참혹한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다가,  주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해서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