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더라.
주 일 예 배
요6:1-11절 말씀입니다.
[이런 일들 후에, 예수께서는 티베랴 바다인 갈릴리 바다로 건너가시더라. 2 큰 무리가 그를 따라가니 이는 그들이 주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그의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 3그리하여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과 더불어 거기에 앉으시더라. 4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더라.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겠느냐?”고 하시니 6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라. 이는 주께서 하실 일을 친히 알고 계심이더라. 7빌립이 주께 대답하기를 “각자가 조금씩 먹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하리이다.”라고 하니 8제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9“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하더라. 10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시니, 그 자리에는 풀이 많더라. 사람들이 앉으니 그 수가 약 오천 명이더라. 11 예수께서 빵을 가지고 감사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 주시니 제자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더라. 또 물고기도 같은 방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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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절에[이런 일들 후에, 예수께서는 티베랴 바다인 갈릴리 바다로 건너가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O 지난 시간에 주님께서는 5장 마지막 절에서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의 글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말들을 믿겠느냐?]고 말씀 하십니다.유대인들이 그토록 좋아 하며 추종했던 모세인데도 그가 기록해 놓은 글들도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믿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나의 말을 믿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O 그러나 유대인들뿐만 예수에 관한 글들을 믿지 못한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제자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말씀도, 그리고 주님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도 사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눅24:25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 [이런 일들 후에]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런 일들]이란 앞의 5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말씀 하시는데,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고, 그 치유 행위를 안식일에 행하셨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트집 잡히셨던 일과, 또,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내세우심으로써,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마음먹게 된 일들, 그리고 그러한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 강론하시면서 자신에 대한 네 가지 증거들을 말씀하셨는데 (1)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침례인 요한이 일과 (2) 자신을 통해서 완수하게 하신일. (3) 아버지에서 증거 하신 일, (4) 성경에 자신을 기록한 일들을 설명해 주신 일 등을 말합니다.
O 바로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건너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4:1-3절의 상황과 비슷한데,그 때도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악한 자들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2절에 [큰 무리가 그를 따라가니 이는 그들이 주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그의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그렇습니다. 큰 무리가 주를 따라갔던 것은, 그들이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자신들의 왕으로 영접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주를 따른 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주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주를 섬기는 가운데서 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O 다시 3-4절에 [그리하여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과 더불어 거기에 앉으시더라.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인 사역을 시작 하신 후, 세 번째 유월절을 맞으십니다. 처음 유월절은 2장에서 맞으셨고, 두 번째 유월절은, 5장에서 맞으셨고 그리고 여기 6장에서 세 번째를 맞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유월절은, 주님 자신이 스스로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실 차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행하시는 삼년 반 동안 맞으시는 네 번의 유월절 중,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어린 양이 되시는 유월절이었던 것입니다. O 5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지기를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겠느냐, 고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큰 무리가 어떤 이유에서 주님께로 모였건 간에,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몰려오는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러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저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이 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해는 떨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그래서 빨리 이 사람들을 마을로 돌려보내서 각자가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제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14:14-15절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서 주님 [이곳은 외딴 곳이고 그리고 저녁이 되었으니 빨리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 각자 양식을 사 먹게 하소서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에게로 온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미 마련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O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지금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6절에[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라. 이는 주께서 하실 일을 친히 알고 계심이더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이렇게 일부러 물으신 것입니다. 또, 눅24:17-26절까지 보면,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그들 눈에 띄지 않게 동행하시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다 들으셨는데도 [너희들이 걸으면서 슬픔에 잠겨 서로 주고받은 이 말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 이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근래에 일어났던 일을 당신 혼자만이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오히려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자, 제자들이 십자가께서 처형되신 예수님의 부활에 얽힌 그간의 소문을 상세히 설명 드립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아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사람들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O 우리들도 주님께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시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어떤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만을 깨닫고 낙담하고 앉아 있는가?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43:5절에는[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담하느냐?어찌하여 네가 내 안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7절에 [빌립이 주께 대답하기를, 각자가 조금씩 먹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하리이다. 라고 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계산이 아주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사실 엉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계산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는 계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계산기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계산기와는 확연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계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 있는 계산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계산기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었습니다. O 그래서 빌립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계산해 보았지만 하필이면 [이백 데나리온]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계산도 사실은 틀린 것입니다. O 그래서 빌립은 자기가 계산해 놓고도 자기 스스로 [이백 데라리온]도 [부족 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백]이란, 숫자는 언제나 좋지 않은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O 수7:21절에 보면[내가 약탈 물 가운데서 아름다운 바빌론제 옷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무게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서 그것들을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그것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에 숨겼으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O 재판관기(사사기) 17:4절에 보면 [그러나 미가가 그 돈을 자기 어머니에게 돌려주니 그의 어머니가 은 이백 세겔을 취하여 주물공에게 주어 그가 그것으로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들었더니 그것들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고 말합니다. 삼상30:10절에 보면, [심히 기진하여 브솔 시내를 건널 수 없는 이백 명은 뒤에 남았고,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백 명은 추격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삼하14:26절에 보면, [반역자 압살롬의 머리를 깎아서..그의 머리털을 달아보니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이백 ]이란 숫자는 언제나 좋지 않은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다시 8-9절에 [제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불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염되는 특성을 갖습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현장에서 실제로 목격하고서도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에 대해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이 [각자가 조금씩 먹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하리이다.] 하고 말씀드리자, 이번에는 안드레가 연약한 자신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동안 제자들이 주님의 기적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얼마입니까? 그렇다면, 주님, 비록 [소년이 가지고 온 것은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지만, 그러나 주께서 함께 하시니 이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믿습니다.]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었고, 그리고 항상 주님의 기적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보통의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다고 말하고, 주를 믿는다고는 고백은 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가 생기면, 우리 자신이 봐도 부끄러울 정도로 일반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여전히 자신의 환경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하신다면,모든 일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O 그래서 우리들의 믿음과 삶이,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과 바라는 바가 일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에서 겉돌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따로 국밥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국밥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국에다 밥을 말아서 나오는 것인데, 말은, 국밥이라고 해놓고, 국 따로, 밥 따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말만 국밥이지 국밥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 따로, 행동 따로, 기도 따로, 걱정 따로, 말씀 따로, 생활 따로 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가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비록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 말씀의 능력은 무능한 상태로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O 설령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어떤 제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집안 어디에서 쳐 박혀서 먼지만 싸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이 주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고, 내 삶 자체가 기도가 되고, 내 삶 자체가 신앙이고, 내 삶 자체가 믿음이 되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O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주와 함께 있으면서도, 주를 믿으면서도, 항상 기도하면서도,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닥치면, 주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보다는 그 문제의 환경에 빠지게 되어 절망과 낙심과 좌절이 떠나가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창조주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바로 그 문제 앞에서 즉시 해결책을 마련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O 그런데 그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지금 제자들은 [이것들이...얼마나 되겠나이까?]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려운 일에 당면했을 때,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통하여 그 어려운 문제를 바라다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은 사실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루 스물네 시간, 1년, 열두 달 동안 한시도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떼지 말고, 그분만을 응시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 눈앞에는 능력의 하나님만 계실 뿐, 고통과 절망은 결국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 위해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에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는 전능하신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를 믿고 신뢰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주께 고정 시키고 앞으로 나가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우리의 발로 밟고 걸어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곧장 앞으로 가다가도, 문제를 만나면, 또 세상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고 주위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신의 잘못을 깨닫고 제 빨리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요청하면 주의 구원하심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O 마14장에 보면, 한번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게 되어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폭풍을 뚫고 바다위로 걸러 오시는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를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이때 주께서 [나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에게 명하여 물 위로 주께 오라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오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갑니다. 물 위로 걸어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베드로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바다위로 걸어서 주께로 향하는 상황에서도 바람과 파도는 여전히 거세게 불어옵니다. 그때, 겁이 난 베드로가 눈을 돌려 파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즉시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해 주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때 주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드시면서 [너 믿음이 적은 자야,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고 말씀 하시면서 베드로를 구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14:31)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갔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잔잔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람과 파도가 더 강하게 불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며 어느 순간까지는 앞으로 나가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겁에 질러 눈을 돌려 문제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다가 그만 그 문제의 바다 속에 빠져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겨 주를 바라보며 주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10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을 앉게 하라, 고 하시니 그 자리에는 풀이 많더라. 사람들이 앉으니 그 수가 약 오천 명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약 오천 명]이었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성인 남자들의 숫자만 계산한 숫자입니다. 여기에 어린 아이와 여자들을 합하면, 이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종일 먹지 못해 시장한 사람들에게 이제,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때가 되신 것입니다.
O 사실, 주께서 우리에게 너희의 믿음으로만 살아가라고 말씀 하신다면, 우리는 다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우리의 믿음만으로는 어쩌면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몰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초라하고 빈약한 믿음에 따라 은총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따라, 오늘도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에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 지라도 주님의 그 풍성함 속에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그것은 주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자비 앞에서 우리가 믿음 없었던 것을 부끄러워하며 믿음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향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은 또, 한 번의 제자들을 향한 시험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5절에서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겠느냐?]고 물으셨던 이유가 제자들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면, 여기 10절에서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명하신 것 역시 그들을 향한 순종에 대한 시험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사람들을 마을로 돌려보내 각자가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해야 하지,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을 앉혀 놓고, 겨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도대체 어쩌자는 것입니까?]라고 주님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O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거기에 순종만 할 뿐, 주님께 [왜] 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무엇이든지 그 즉시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요, 그분은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명령자이시오,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 [왜]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어째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았어야 했습니까?그것은 [먹으면 죽으니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먹지 말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O 홍수가 닥쳐올 것 같은 기미가 전혀 없는데도 왜 노아는 방주를 건조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순종했기 때문에 노아와 그 가족이 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면, 인간은 그에 따를 뿐, 여기에 어떤 이유를 대거나, 어떤 핑계를 댈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던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의 이 명령에는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크게 보완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그 결과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믿음도 약하면서, 만약, [하라]는 대로 순종까지도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영적 상태라면,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를 의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령 믿음이 아직은 연약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하지 않고 순종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필요를 충족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10절의 상황이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의도 가운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질서 정연한 가운데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6:40절에서는 이때 [그들이 백 명씩, 혹은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더라]고 말씀 하십니다. 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14:40절에[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질서와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질서 있고 평강 가운데서 조용히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기다림의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달 릴 수가 없습니다. 신뢰가 없으면 기달 릴 수가 없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기달 릴 수가 없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기달 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이 없으면 주께로부터 오는 응답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응답은 언제나 기다림 끝에 오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기다리라] 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합3:3절에 보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O 시37:7절에 [주 안에서 쉬고(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인내하며 그를 기다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누구 하나 조용히 앉아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조용히 앉아 주님의 응답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용히 주의 자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용히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용히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용히 주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금함과 답답함에 참지 못하고,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브라함의 부인 사래처럼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다리지를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는 자의 어깨를 조용히 누르시면서 렘애 3:26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바라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은 것이라.] 다시 말하면, [내가 응답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 왜냐하면, 그 기다림이 네가 기대하고 바라는바 너에게 좋은 응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O 11절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고 감사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 주시니 제자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더라 또 물고기도 같은 방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겨우 보리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것을 앞에 놓고 오히려 감사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너무 작고, 너무 보잘 것 없고, 너무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아주 작은 것, 매우 하찮은 것, 사람들의 눈에 차지도 않은 것들로부터 큰 역사를 이루시고,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보잘 것 없는 그 작은 것을 통해서, 묵묵히 훈련을 받으면, 비로써 그에게 큰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작은 것의 소중함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를 매우 귀히 여기고, 마침내 그에게 큰 것을 주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7절에 [그에게 말하기를 ‘잘하였다,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에 들려진 보잘 것 없는 지팡이 하나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O 하나님께서는 소년 다윗의 돌 맹이 다섯 개와 물매를 사용하셔서 필리스티아의 거인골리앗을 거꾸러뜨리셨습니다.(삼상17:40).
O 어린 여종 하나를 통하여 문둥병에 걸린 막강한 용사 나아만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나아오게 만드셨는가 하면(왕하5:2). O 한 과부가 한 줌밖에 안 되는 가루로 선지자 엘리야를 먹여 살리게 하셨습니다. (왕상17:12).그래서 기적은 작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병들고 못나고, 지혜도 없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 미약한 것들로 역사하시기를 시작 하시는 것입니다. O 그래서 주님은 욥8:7절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크게 증대하리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롭다고 떠들어 대는 자들을 오히려 어리석다고 택하셔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전1: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대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O 주께서는 보잘 것 없는 음식 얼마를 앞에 놓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는 종이나 제자들을 동원하여 함께 일하도록 하시고, 또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도록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던 첫 번째 기적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고전3: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우리들이 없이도 얼마든지 일을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도 연약하고, 용기도 없고, 또 겁과 두려움도 많은 우리에게 그 일을 시키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주님의 영광과 특권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우리들이 사람들을 먹이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 풍성하심과 굶주린 무리들 사이에 우리들을 세우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을 먹이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이 사역에 동참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만 하는 것입니다. O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우리에게 맡기셨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물고기도...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더라]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때, 그 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이 원하는 만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20:4-5절에 [네 마음을 따라 네게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과...주께서 너의 모든 간구를 이루시기 원하노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 어느 때고, 어느 형편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들이 원하는 만큼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입니다. 창세기18장을 보면, 소돔을 멸하는 문제를 놓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은 조건으로 주님께 의인 50명을 제안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곳에 의인 50명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45명을 수정 제시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은 45명의 의인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계속 40명, 30명, 20명, 그러다가 결국 의인 열명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수정 요청하는 아브라함의 요청을 중도에서 가로막지 않으시고 그가 [원하는 만큼] 아브라함의 요청을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좋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명을 위해서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원하는 대로 채워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왕하4:5-6절에서 모든 빈 그릇이 가득 찰 때까지는 주께서 채워 주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서 부족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하신 것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담아낼 충분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되시므로 여러분들이 원하는 만큼 주께로부터 받는 삶을 사시다가 주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해서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