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내가 기쁨으로 충만해지고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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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1:1-8절말씀입니다.
먼저1-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 2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부터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3 선조 때부터 순수한 양심으로 내가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함은 나의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기억함이며,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를 몹시 보기 원함은 내가 기쁨으로 충만해지고자 함이라. 5 나는 네 안에 있는 가식 없는 믿음을 기억하노니, 이는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케 안에 있었고 네 안에도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말씀합니다.
O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끝내면서 우리에게 6장에서 세 구절의 말씀으로 큰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바로 5절,10절, 20절의 말씀인데, 5절에 보면,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고 말하면서, 10절에 가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20절에서는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O 무슨 말인가 하면,“소위 자신도 믿는다고 떠들어 대면서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한 사람과는 아예 논쟁하지 말고, 그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아예 가지도 말고,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한 거짓되이 일컫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보문 이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바울의 유언이 담겨져 있고 그리고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충고와 권고와 격려가 들어있습니다. 이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 에 있었고,(1:8) 그래서 이 마지막 서신도 역시 감옥 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O 그래서1:16-17절에 [주께서 오네시포로의 집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이는 그가 종종 나에게 생기를 돋워 주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으며, 17 오히려 그가 로마에 있을 때 매우 열심히 나를 찾아 만났음이라.]고 말합니다. O 바울은 로마 감옥에 두 번, 투옥되었는데, 오늘 본문은 바울이 두 번째 투옥 되었을 때입니다. O 바울이 첫 번째 로마 감옥에 투옥된 것은 행28장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투옥되었을 때와, 본문에 서의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의 상황이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 첫 번째 투옥되었을 때에는 관계자들이 바울을 매우 관대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 밖에서 살도록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O 그래서 행28:16.30-31절에 보면, [우리가 로마에 다다르니 백부장이 죄수들을 경호 대장에게 넘겨주었고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병사와 함께 혼자 있도록 허락하더라. 바울이 만 이 년을 자기 셋집에서 지내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여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치되 모든 담대함으로 하였으니 아무도 그를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말합니다. 또, 첫 번째 투옥되었을 때는,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 곁에 많이 있었습니다.(골4:10-14,행28:17-31, 빌1:13-14). 그래서 이때는 누구든지 바울을 보러 들어올 수 있었고(행28:30). 바울역시도 첫 번째 투옥 되었을 때는 곧 풀려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O 그래서 빌1:25-26절에 보면, [이런 확신이 있으므로 나는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모두와 함께 계속 남아 있을 줄 아노라.26 이는 내가 너희에게 다시 감으로 너희의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로 인하여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빌2:24절에서는 [내가 주를 믿노니 나 자신도 속히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는, 첫 번째 상황하고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 감금되어 감옥 밖으로는 한 발작도 나갈 수 없었으며, 심지어 감옥 안에 있을 때에도 사슬에 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두 번째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O 그래서 딤후4:8절에서 바울은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바울의 친구들도 바울을 모두 다 떠나버렸습니다.
O 그래서 딤후4:16절에 [내가 처음 변호할 때에는 나와 함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탓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노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두 번째 로마 감옥에 감금되었을 때는, 첫 번째 때와는 많이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O 그러나 오늘날 엉터리 학자들, 교수들, 목사들은 사도행전 28장과, 디모데후서 4장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은 바울은 “로마 감옥에 단 한번만 투옥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맡 다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곧 풀려나게 될 것이라고 했던 (빌1:25-26,빌2:24)그의 말들은 모두 헛된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O 바울이 첫 번째로 로마 감옥에서 풀어나, 두 번째 체포되기 전에, 바울은 트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마케도니아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고후2:12-13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트로아에 갔을 때 한 문이 주 안에서 나에게 열렸으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영이 평안하지 못하여 그들과 작별하고 거기서 마케도니아로 갔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로 가면서, 바울은 자신의 “외투와 성경”을 “트로아”에 두고 갑니다.
O 그리고 이때는 바울의 사역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로마 황제는, 반 미친 사람이었던 “네로” 습니다. 네로는 스스로 로마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두 뒤 집에 씌우고는 대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들립니다. 바울역시 체포되어 두 번째로 로마에서 투옥됩니다. 감옥은 몹시 추었습니다. 그래서 딤후4;13절에 보면,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서 특별히 부탁하기를 [네가 올 때 내가 트로아에 있는 카포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오라. 또 책들을 가져오되 특히 양피지로 된 것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O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것으로 뒤 집어 씌운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일 때, 아주 지독한 고문을 하고 그리고 불에 태워 자신의 궁전 정원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화형을 시 킬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행22:29절에 [그러자 즉시로 그를 심문하려 했던 자들이 그에게서 떠나고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는 사령관도 두려워하더라. 이는 자기가 그를 결박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O 당시 로마 시민은 죄를 짓고 사형의 형벌을 받을지라도 십자가에 처형하거나, 화형에 처하지 않고 고통 없이 신속하게 처형하는 방법으로 목을 베여 죽었습니다.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역시 목 베임 당한 것입니다. 설령 바울이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네로황제는 바울을 불태워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카이사의 궁전 안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O 그래서 빌1:13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갇힘이 모든 궁전 안과 다른 모든 곳에도 알려졌음이라.]고 말하십니다. 이것은 카이사의 궁전에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은 바울을 불에 태워 죽이지 못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O 그리고 그때 카톨릭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며, 로마교회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는, 바울이 로마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나, 아니면 그전이나, 그 이후에도 불문하고 단 한번도 로마에 가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쉽게 알려 주는 곳이 신약에서 두 곳에서 들어나는데 하나는, 로마서 16장이고, 다른 하나는,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O 만약, 당시에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면,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하여 약 삼십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거명하며 인사를 묻는 편지를 쓸 때에, “베드로”에 관해서도 말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베드로에 대해서 단 한마디로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로마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갔을 때는(행24,25,26,27장).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 지지 않았을 때였습니다(롬15:20).
O 그래서 롬15:20,22절에 보면, [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한 곳에서만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다 짓지 아니하려 함이라. 22 이로 인하여 내가 너희에게 가려던 것도 여러 번 방해를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로마 근처에도 와본 일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O 그래서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도로, 로마교회의 초대 교황으로 말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이 만들어낸 거짓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로마 근처에도 결코 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4:11절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O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1절은, 골1:1절과도 연결됩니다. 골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는]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생명의 약속에 따라]고 말합니다. 이 생명의 약속을, 딛1:2절에서는 “영생의 소망” 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창1:1절 이전에 아버지에 의해 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딛1:1-2절에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니, 이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에 따른 진리의 지식에 따라 2 영생의 소망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 이 영생의 소망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약속하셨다가]라고 말합니다.
O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일5:11,20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20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참되신 그분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참되신 그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O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요일5:l0-13절을 읽어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12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O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롬6:23절에[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분이셨습니다. O 그래서 요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약속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1:1절에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말합니다.
O 3절에 [선조 때부터 순수한 양심으로 내가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함은 나의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기억함이며,] “선조 때부터....내가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함은”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조는, 바울의 유대인 선조들을 말합니다. 바울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23:1절에 [그때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며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선한 양심으로 살아 왔노라.”]고 말합니다.(행24:15) 롬9:1절에서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니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나에게 증거 하는 것은]이라고 말합니다.(딤전1:19).
O 3절에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은 매일 기도로 디모데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첫째는 디모데의 사역이고, 둘째는 디모데의 믿음이었습니다. 다시 4절에서 [너를 몹시 보기 원함은]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것은 사역에 있어서“아들”로서 양육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O 젊은 모세는, 인생의 3분의1을 살았을 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놔두고 떠났습니다. 젊은 요셉도, 젊은이로서(약 열일곱 살)소망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인내했습니다. O 젊은 다니엘은,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도로 승리했습니다. 젊은 리브카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 O 젊은 에스더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젊은 요나단은 사랑 안에서 다윗에게 모든 것을 넘겼습니다. O 젊은 다윗은, 스무살도 채 안되어 막강한 적들을 상대하여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딤전4:12절에 [아무도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O 5절에 [나는 네 안에 있는 가식 없는 믿음을 생각하노니, 이는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케 안에 있었고 네 안에도 있음을 확진하노라].고 말합니다. 히11:1-15절에 보면, 이런 믿음이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안에도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구원하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디모데의 부모는“경건”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들었을 때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O 6-8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를 일깨우는 것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듯 일어나게 하려 함이라.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 8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나 그의 죄수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O 디모데는, 아무 두려움 없이 사역을 수행해 나가야만 했습니다.(5,8,12절). 그래서 바울은 이에 필요한 사실들을 다시 디모데에게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디모데에게는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사역을 담대하게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사를 일어나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O 그래서 6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를 일깨우는 것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듯 일어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에게는,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주어진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주어진 “은사”는, 14절에서는,“그 좋은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좋은 은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O 그러나 그 은사가 무엇이었든 간에 디모데에게 주어진 이 은사는,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서, 아주 좋은 것이었고, 그리고 이 은사는, 디모데가 사역을 하는데 아주 큰 힘이 되는 은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불 일듯 일어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으키라’ 다시 말하면 주께서 너에게 주신 그 “은사를” 너의 사역에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O 다시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으로 복음을 전할 능력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 능력은 우리를 아주 담대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O 이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가 배우지 못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지식은 없을지라도 예수와 함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O 그래서 행4:13절에 [그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로 알았다가 놀라며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O 그래서 “능력의 영”이라는 이 말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바로 성령을 통해서라는 말입니다.
O 그래서 슼4:6절에 [그러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일러 말하기를 “이것이 스룹바벨에게 하신 주의 말씀이라. 말씀하시기를 ‘힘으로도 아니요, 능력으로도 아니며, 오직 나의 영에 의해서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주의 영이 함께합니다.
O 그래서 우리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는 이상,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일부러 넘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능력도 있고(롬6-7장).기도응답 받을 능력도 있고, 치유의 능력이 있고, 복음을 전할 능력도 있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는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능력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영적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O 그래서 고전10:3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요일3:22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들을 행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O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고통과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고후7:4-7). 세상을 이길 능력도 있습니다.(요일5:1-5). 또 우리에게는“사랑”의 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롬8:28,고후11:25-30.12:8),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O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있고(요14:23).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5:1절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께로부터 태어난 자도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O 또, 우리에게는 “건전한 생각”의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건전한 생각”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생각(요17:17)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올바로 나눌 수 있는 생각(딤후2:15)을 주셨습니다. “건전한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O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건전”한 마음은 하나님께 의탁하는(사25;3) 마음이고, 화평 안에서 지켜지는 마음(빌4;7)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O 그래서 고전2:16절에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생각을 가진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살후2:2). 교만하지 않습니다(고전8:1). 이 생각에는 지혜가 있습니다(골2:2.3절) 이 생각을 가진 사람은, 더럽혀 지지 않습니다.(딛1:15). 이것이 바로 거룩한 성경이 말하는“건전한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건전한 생각을 받기 전까지는 세상에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O 8절에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나 그의 죄수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 [그러므로 너는....부끄러워하지 말고]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신, 온전한 정신, 자신에게 어떤 영원한 세계가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O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부끄러움을 당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딤후4:16절에 [내가 처음 변호할 때에는 나와 함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고 말합니다.
O 다시 [우리 주의 증거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잡히시고 투옥 되신 것을(사53:8)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죄수 된 나를]이라고 말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빌라도의 포로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l9:11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위에서 네게 주신 것이 아니라면 너는 나를 대적할 아무런 권세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준 자는 더 큰 죄를 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O 바울도 자신을 “네로 황제”의 죄수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네로 황제의 죄수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죄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죄수 된 나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종인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울의 모든 것을 결정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O 무엇을 결정 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체포되게 하실 것인지, 체포되지 못하게 하실 지에 대해서 바울은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합니다.
O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있게 되었다면(빌1:12-14)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벧전5:14) 감옥 속에 있는 것이지, “네로 황제”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에 관해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힘도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합니다.O 그래서 빌1:12-14절에 [그러나 형제들아,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오히려 복음의 진전이 되었음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13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갇힘이 모든 궁전 안과 다른 모든 곳에도 알려졌음이라. 14 그리하여 주 안에 있는 형제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나의 갇힘으로 인하여 확신이 커져서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히 말씀을 전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O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나의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주께서 내 삶을,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0 그리고 우리는 열심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 전파에, 주님의 그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주의 일에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주의 일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시다가 예수의 날, 그리스도의 날,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영원히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