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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기쁨이 넘치고...

박종각 2020. 4. 13. 00:00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기쁨이 넘치고...

 


                                 고후8:1-6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2큰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기쁨이 넘치고 그들의 심한 궁핍에도 풍부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느니라.3내가 증거 하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에 따라 하였고 또 능력 이상으로 자원하여 하였으며 4우리가 은혜를 받을 것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할 것을 많은 애원으로 우리에게 간청하였느니라. 5그들이 이것을 행하였으니 우리가 바라던 대로만이 아니라 먼저 자신들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이 은혜를 준 것이라. 6그러므로 우리가 디도에게 권하였던 것은 그가 전에 시작하였던 바와 같이 이 은혜를 너희 안에서도 완성시키라는 것이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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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절에[형제들아,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능한 사람을 흔히“팔방미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팔방미인처럼 사용되고, 적용되고, 활용되는 것이“하나”있습니다. 그것이 바로“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가지 않는 곳이 없고, 이 은혜가 거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이 은혜를 들어 내지 않는 곳이 없고, 또 이 은혜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0 그래서“은혜”는, 이 세상 어디에나, 어느 곳이나, 어떠한 사람에게서나 어떠한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도, 빠짐없이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빠짐없이 적용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곳에서도 은혜가 적용되는 것입니다.(계14:13)


0 이“은혜”가 사람들에게 처음 적용된 것은, 바로“구원”에 관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와 평생을 같이 살다가, 이 은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0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에게“알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이“하나님의 은혜”는,“구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와 아카야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알게 해 주겠다는 이“은혜”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행하는“베푸는 일”즉“물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0 사실, 하나님의 은혜로“구원”을 받은 것은, 고린도교회들이나, 마케도니아 교회들이나 같지만, “배푸는 일”에 있어서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자기들의 능력 이상으로 기쁨이 넘치도록 행하고 있었지만, 그러나“고린도교회”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점을, 알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0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베푸는 그 은혜가“그들의 풍족함”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심한 궁핍에]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2절에 [큰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기쁨이 넘치고 그들의 심한 궁핍에도 풍부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시적이지만,[심한 궁핍]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구원의 은혜”로, 기쁨이 넘치고 있었고, 그 기쁨은 자신들이 당한 큰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그것도 자원하여 주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0 그래서 3절에서 바울은 [내가 증거 하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에 따라 하였고 또 능력 이상으로 자원하여 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본문 12절에서“영적원칙”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할 마음만 있다면 사람이 가진 대로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받지는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마음”이 아니라,“할 마음”입니다.“주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0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주께 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영적원칙”에 따라 주께 드릴“마음”이, 내게 존재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주께 들려졌을 때 그것은 주께서 기뻐 받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0 마리아는,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매유 귀한 향유를 한 옥함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영적 원칙”에 따라“향유”를 주께 드렸습니다. (막14:8,요12:3), 0 어떤 사람은, 나귀와 나귀 새끼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0 그러나 그 사람은 지금 자신이 기르고 있는 그 나귀 새끼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실“나귀”라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그 나귀 새끼를 가져가기 1분전까지도 몰았지만. 그러나 그는“영적원칙”에 따라 주께 드렸습니다.(막11:4),


0 어떤 여인은, 자기 집에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큼직한 다락방을 만들어서 빈방으로 관리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다락방을 지상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는 주께서 사용하실 다락방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영적 원칙”에 따라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실 수 있도록 주께 내드렸습니다.(눅22:12)


0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자신의 묘지로 쓸 목적으로 바위로 된 묘 자리를 구입하고, 그 바위 속을 파내고 좋은 무덤을 만들어서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묘는 자신이 아니라, 주께서 사용할 묘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았습니다. 하지만, 그는“영적 원칙”에 따라 그 새 무덤을 주께 드렸습니다.(마27:57-60)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는 바로 주님을 향한 나의“의지”라는 것입니다.





0 지금 주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을, 나는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내“의지”또한“그러하다면”우리는 마치, 주님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언제든 주께 기쁨으로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의지”에 관해 우리를 다루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우리에게 강제로 하게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0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단지, 인간들을 향한 주님의 요구는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한 있을 뿐인 것입니다. 0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들이기를 원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교회로 끌고 올 밧줄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원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을 위해 강제노동을 명령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0“주님, 오늘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네요, 그냥 집에서 드라마나 보면서 집에 있겠습니다.”“주님, 오늘 친구들과 도봉산으로 등산 가기로 해서 오늘 예배에는 못갑니다.”“그런가? 그런데 자네가 집에 있으면서 드라마 보는 것이나, 자네가 친구하고 도봉산에 가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것이 자네 뜻이라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네”“하지만, 그것은 내 백성을 향해,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뜻은 아니라네.”“그것은 내 뜻이 아니 라네”





0 그래서“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는, 이 주님의 말씀이 마치“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말씀”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영적으로 감지하고, 주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신의 옷깃을 여미는 사람만이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멸망에서”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0 그래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의도는,“내가 너희에게 준 그“자유 의지”에 따라 네 스스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의지를, 나 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그 자유의지에 따라, 마귀를 따라 육신의 정욕대로 살 수도 있고, 그 자유의지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0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일에 대해 놀라운 상급을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 있으며, 그 의지의 선택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불구덩이 지옥으로 떨어 질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우리 모두는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았던 것들에 대한 최종 결론을 얻기 위해서 엄중한 심판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0 그래서 전도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니, 이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전12:13-14)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0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들 앞에는 두 길이 있을 뿐입니다. 오른쪽 길은, 자신의 모든 죄들이  제거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주께로 믿음으로 달려 나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왼쪽 길은, 자신의 모든 죄들이 제거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주께로 오는 것을 거부하고 내 육신의 뜻에 따라 마귀가 인도하는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0 자신들의 모든 죄들이 제거된 두 사람이 지금 두 길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들이 선택한 그 길로 나가야만 합니다. 물론, 자신들의 모든 죄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라면, 그들 모두는 주께로 달려 나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그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0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의 과거의 죄들은 모두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완전히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들도 모르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다는 자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땅의 인간들의 모든 죄들은 완전하게 사함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실을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전파의 초기는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0 그래서 막1:4절에[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모든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모든“죄들을 이미 용서 받았기 때문에”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침례를 받으므로 거기에 대한 자신의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이 아야 하는 것입니다.


0 그래서 벧전3:21절에서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는 이 말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아 [선한 양심] 다시 말하면 “새 양심”을 갖게 된 우리는, 나를 구원에 주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주여!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행동으로 응답하는 것이 바로 [침례]인 것입니다.





0 그래서 눅3:3절에도 보면 [그가 요단 강 주변에 있는 온 지방에 가서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행2:38절에서 베드로 역시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O 주께서는 눅24:47절에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이 선포되어야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마26:28절에는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0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죄들이 완전하게 제거되고 사함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주 앞으로 달려 나와 주께 경배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0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죄들이 모두 다 제거되었고, 과거의 모든 죄들이 다 사함 받았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그 엄청난 일을 죽음으로 행하셨던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옛 죄악으로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 주신 그분께 나오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것으로 지옥에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이미 지난 과거의 모든 죄들, 죄와 사망과 멸망으로 떨어질 그 모든 죄들은 다 제거되었고, 지난 죄들은 모두 용서받아 놓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해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열 명 중 아홉 명이라는 말입니다.


0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열 명 중, 단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은 완전하게 열려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입니다. 그래서 눅17:17-1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열 명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냐?”고 하시고 19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0 눅22:4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길로 가는데, 우리의 뜻은 저 길로 가는 갑니다. 그런데 이 길로 가는 하나님과, 저 길로 가는 우리가 만나는 한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짊어 져야 하는 “십자가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0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엇갈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내 뜻과 이 길로 가고, 하나님의 뜻이, 저 길로 갈 때, 우리는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0 그것이 바로“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바로 그 지점이 되는 곳인 것입니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가는 곳이고, 바로 거기가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곳인 것입니다.  4절에 [우리가 은혜를 받을 것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할 것을 많은 애원으로 우리에게 간청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마케도니아에 어떤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은 선물을, 사도 바울에게 제발 받아 줄 것을 애원하며 간청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풍요로움의 축복을 그들 역시 받아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쁘게 받은 것입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고
  죄를 멀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