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고전15:30-32절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어찌하여 매시간 위험에 처해야 하겠느냐?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지니고 있는 너희의 자랑으로써 단언하노니 나는 매일 죽노라·내가 만일 사람들의 방식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도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 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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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또, 30-31절에[또 우리가 어찌하여 매시간 위험에 처해야 하겠느냐?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지니고 있는 너희의 자랑으로써 단언하노니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위험을 무름 쓰고, 또 시간과 돈과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이유가 있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O 사실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놔야 하는 그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1절에서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매일같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죽음]에는 두 가지의 의미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의미에서 죽음”이 있고, 두 번째는, “실천적인 의미에서 죽음”이 있습니다. 롬6:1-6절에서는, 교리적인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O 롬 6:1-6절에 보면[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3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 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모양으로 함께 심겨졌다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의 모양과 같이 되리라. 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O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교리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매일]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아직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육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 육신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O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죄의 육신을, 다시 말하면, “몸의 행실”을 시시각각으로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더러운 “몸의 행실”로부터의“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3:12절에서 [밤이 많이 지났고 낮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어두움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말합니다. O 눅9:23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라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O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주님을 따르는 삶을 실천하였기에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삶을 실천하면서 매일 육신을 죽이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이 주님의 말씀을 전혀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O 그래서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이, 내게 주신“고난과 고통과 역경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이지, 고통을 주는 형틀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이 말씀은 날마다 육신으로부터 도전받는 죄들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0 이것이 바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실천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O 그리스도인은, 교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혼은 더 이상 육신에 붙어있지 않고, 육신에서 도려내어진 채, 육신과는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혼은, 지금 육신이라고 하는 그릇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O 그리고 육신이라는 그릇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는 이제는 육신의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O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사람의 혼은, 마치 육신과 하나인 것처럼 육신에 꼭 붙어 있어서 육신과 하나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혼과 육신”은 같은 뜻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우리가 주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즉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혼을 육신으로부터 도려내시는 수술을 하시므로 우리의 혼을 육신으로부터 완전하게 불리 시킨 것입니다.
O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영적 할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2:11절에서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할례를 통해서 육신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혼이 육신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O 만약 혼이 육신을 떠나게 되면, 그 사람의 육신은 즉시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혼이 영적 할례를 통해서 육신과 완전이 분리가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혼은 육신을 떠나지 않고, 육신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사각 얼음 틀과 같습니다. 처음 냉동실에서 사각 얼음 틀을 꺼냈을 때 보면, 얼음들이 틀에 단단히 붙어 있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음 틀을 옆으로 살짝 비틀면 얼음들이 틀에서 떨어져 나와 음료수 컵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혼도 마치 이와 같은 것입니다.
O 우리의 혼이 성령을 통해서 육신이라는 틀에서 완전하게 분리된 채, 육신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러나 사실은 그 혼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혼이 육신의 그릇 속에 담겨져 있으면서도 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혼속에 있던 ‘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6:17절에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혼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 구원을 상실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O 그러나 육신은, 자기 안에 있는 “혼” 에게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래서 육신은 항상 “혼”에게 시비를 걸고 혼을 거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2: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타국인 같고 순례자 같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신의 정욕들을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O 물론, 혼과 육신 사이의 전쟁에서 육신이 승리를 거둔다고 해서 육신이 혼으로부터 구원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자신이 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육신은 혼에게 항상 덤벼들고 으르렁거리며 어찌하든지 혼과 싸우려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승리의 기쁨을 맛보려면 “몸의 행실”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O 32절에 [내가 만일 사람들의 방식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도 먹고 마시자. 내일이 면 죽으리라, 고 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32절의 말씀은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박해를 무릅쓰고 마귀들이나 짐승 같은 사람들과 대결하여 싸우겠느냐는 말입니다.
O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이 세상 외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기 때문에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세상을 사는 비참한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O 영원한 세상이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그저 먹고 마시며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 외에 달리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으나,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진멸 당했던 것입니다.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짐승처럼 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 모릅니다.
O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 열매들이 되신 것입니다.(20절).
O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육신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갈2:20),
O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직 주 하나님만을 믿고 의뢰하고 신뢰하는 삶을 통해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도로 충만하고 복음으로 충만한 믿음으로 삶을 살다가 예수의 날, 그리스도의 날,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영원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고
죄를 멀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