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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박종각 2019. 9. 29. 00:02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주     일      예     배
                                       히12:4-1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죄와 맞서서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으며, 5또 마치 자녀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으니, 곧“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이라. 7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8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존중하였거늘 영들의 아버지께는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10그들은 정녕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며칠 동안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또 우리로 그분의 거룩하심의 참여자들이 되도록 하시느니라. 11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 12그러므로 맥없이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절뚝거리는 다리로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고침을 받게 하라. 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16음행하는 자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없도록 하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후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 거절당하였으며,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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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본문은, 바울 서신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기록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이 히브리서는 분명히 바울이 기록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기록한 서신은 13권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해 쓴 히브리서 까지 합해 모두 14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고전, 고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서, 골로새서,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디도서, 빌레몬. 히브리서까지입니다. 0본문 4절에, [너희가 죄와 맞서서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으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것은 물론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피 흘리시기까지 싸우셨습니다.


O 다시 5절에 보면 [또 마치 자녀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의 권면의 말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잠3:11-12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고, 그의 나무라심을 싫어하지 말라. 이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꾸짖으시기를, 마치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O 다시 5절에서 [주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체벌을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 때나 아이에게 매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매를 들 적당한 때는, 아이가 매의 의미를 아는 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알맞은 때에 징계 하느니라.]고 잠13:24절에 말씀합니다. 본문에서는, 체벌의 형태가 [징계] 와 [책망]이라는 두 가지로 말씀 하시고, 그리고 이 벌을 받는 사람의 반응도, 역시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경시하는 것]과,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의 자세, 즉 [경시]와, [낙심]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시]라는 것은, 말씀 하시는 분을 [비웃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완고한 자세와 완고한 입술로 하나님의 징계를 비웃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셔도 그는 끄떡하지 않고,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O 사람이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여기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해지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더욱 세상적인 방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O 반면[낙심]은, 고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여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두 가지 것에 대해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6절에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징계라고 하면”잘못을 저지른 사람이거나, 타락한 사람에게만, 주께서 징계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 보면 주께서 징계하시는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정확히 정해져 있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0 다시 말하면,“징계”는, 죄를 짓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주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주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자녀들이라면, 누구나“징계”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주께서 징계 하시는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욥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사실 욥에게는 징계를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O 욥은 항상 주를 두려워하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서령 그가 죽을 자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욥13:15절에서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은 항상 자랑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욥은 극한 고난과 고통의 사망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했고, 아주 혹독한 징계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그러나 사실은 그런 사람이 욥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자들을 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 없이 생을 끝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바울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사랑받은 하나님의 자녀였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자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의 생애에서 너무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하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바울에게 고난을 가하셨는가? 거기에 대해 성경은 다섯 가지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O 첫째는, 고후12:4-8절에서, 그를 겸손케 하기 위해서였다, 고 했습니다. 둘째는. 고후1:1-4절에 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 했습니다. 셋째는, 골3:1-3절에서, 위에 있는 것들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 했습니다. 넷째는, 빌4:13,19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임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였다, 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고후12:9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시련 가운데서 충분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고 했습니다.O 그래서 “징계”라는 것이 반드시 [죄로 인한 징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부족하거나 죄를 짓거나 타락해서 받는 것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O 그래서 “징계”는 죄를 짓고 타락하고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세상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그렇지 않고 깨끗하고 정결하며 주의 뜻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때로 징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O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는 것은, 말이 달리지 않고 꾀를 부린다거나, 달리는 방향이 틀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달리는 말에 더한 힘을 불러 넣기 위한 채찍입니다. 꼭 병든 사람만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약을 먹는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8절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O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징계가 아니라, 무서운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렘6:19).그래서 징계와 재앙은 다른 것입니다. 징계는 사랑하는 자들이 받는 것이고 재앙은 저주받은 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9절에 [영들의 아버지께는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들의 아버지]라는 이 말은,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옵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영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영도 있고, 천사도 영적 존재들이며, 그룹, 스랍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영에는, 사탄의 영도 있고, 또, 동물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3:21절에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O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매우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서 더러운 영들의 아버지라고 불리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린 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며, 또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가 되 실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귀가 그들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8: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영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이것은 단지, 그들을 창조하신 [창조주] 라는 개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O 10절에 [그들은 정녕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며칠 동안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도 자식을 징계합니다. 그러나 그 징계의 동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징계의 동기가 대조됩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지만,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전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익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참여자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O 다시 11절에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징계를 받든 간에 그 징계가 당시에 즐거워 보이는 징계는 없습니다. 징계의 결과가 아무리 좋게 나타날지라도 그러나 징계가 당시에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피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피하고 싶은 것이 징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에] 더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3:7절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네가 지금은 몰라도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이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욥도 고난 받기 전이 아니라, [후에]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인내로 견디는 자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충분하게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그 [후에]입니다.





0 그래서 인내 후에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징계]라는 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있는[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징계의 형태가 네 가지로 말씀 하시는데, 1.가시입니다. 이것은 겸손케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고후12:7). 2.칼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칼로 가지 치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요15:2). 3.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요l5:3). 4.채찍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이 채찍은 성도들이 하늘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골3: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훈련시키는 도구인 것입니다.


O 다시 11절에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은, 모든 것이“그 후에”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모두 후불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복부터 먼저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O 복 받기를 원하는가? 주께로부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가? 주께로부터 쓰임받기를 원하는가? 주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응답받기를 원하는가? 과연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신가?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주시지는 않습니다. 반듯이“그 후에”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그 후에”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내 후에 있을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속에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 즉 이 모든 고난과 징계를 [인내]로 견딘 사람들만이 보상을 받도록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인 이 하나님의 징계를 잘 견디어 낸다면, 그는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약1:3-4절에서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그러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가 온전하고 잘 갖추어져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O 12-13절에 [그러므로 맥없이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 은 길을 만들어 절뚝거리는 다리로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고침을 받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은, 책망을 받고 낙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5절). 그러나 아들을 징계하시는 아버지께서는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고 세우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O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닥칠 때, 오히려 감사하며 연단을 위한 기회로 여기고 오직 주님을 앙망하는 가운데(사40:3l) 곧은길을 만들어, 절뚝거리는 다리로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4:26-27절에 보면, [네 발이 가는 길을 잘 살펴 네 모든 길을 굳게 세우라. 오른편이나 왼 편으로 돌이키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O 앞을 항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우로나 좌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쉽게 에워싸 버리고, 그리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실족시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징계를 받고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뚝거리는 다리] (13절)는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 했던 야곱이 천사에게 얻어맞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야곱의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절뚝거리는 다리로 그가 가야할 길을 갔던 것입니다.


O 그래서 야곱의 다리처럼 우리가 절뚝거릴 수 있고, 야곱의 [쇠약한 무릎]처럼 , 우리의 무릎이 쇠약한 무릎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은 주께로부터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처진 손]과 [쇠약해진 무릎]으로 그대로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고침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O 왜냐하면, 그 다리는 단지 가만히 쉬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다리는 차분히 걸으면서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재활치료]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반드시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 최선의 방법은 적당한 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O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40:29-31절에 [그는 곤비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 무력한 자에게 힘을 더해 주시나니 젊은이들일지라도 곤비하고 피곤하며, 청년들이라도 완전히 넘어지나 오직 주를 앙망하는 자는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 독수리처럼 날개로 치솟을 것이요, 그들이 달려도 피곤치 않으며 걸어도 곤비치 아니하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O 그래서 다시 주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앞서 달려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저 골인 지점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달려갔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관중석을 가득 채우고 우리를 응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안타까워 하지만 다시 일어나라고 격려하며 응원합니다. 일어나 걷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O 14-17절에 [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16)음행하는 자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 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없도록 하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후,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 거절당하였으며,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O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의 특징인 환란시대의 교리가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악을 행했습니다. 모세도 살인을 하고 도피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을 뵙지 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대 환란 때에 있어서는, 화평함과 거룩함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은 대 환란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인 것입니다. O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휴거되고 난 후에, 이스라엘은 [야곱의 고난의 때] 라고 불리는 대 환란을 통과합니다. 그때 그들은 전무후무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0 그리고 그때 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은 모든 고난을 인내로 [끝까지]견뎌야 하며,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들이 인내로 [끝까지] 견디고자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히10:38, 39,마5장). 하지만 이때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평함과 거룩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환란 때, 이들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들이 주님을 대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바로 화평함과 거룩함인 것입니다.


O 대 환란 때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이실 것이지만, 환란 중에 나타나실 때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위해서(히9:28) 그들에게 개별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마17:7) 그러므로 14절은, 환란 중간에 또는 환란 끝에 유대인 [남은 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모습을 보여 주는 구절인 것입니다.


O 15절에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열심히 돌아보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쓴 뿌리가 나타나 성도들을 오염시키고 교회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탄의 세력들이 간교한 모습으로 진리인양 가장하고서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O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은혜에서 떨어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쓴 뿌리로 인해 더럽혀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히6:4-6). [쓴 뿌리]에 대해서는, 율법 아래 있던 구약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경고인데(신29:18).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내릴 것이며,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로부터 지워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신29:20).





O 그런데 바로 그와 똑같은 경고가 히브리서 12장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는, 우리가 사는 교회시대를 향한 경고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와 같이 유대인의 경륜이 회복되는 때, 즉 대 환란 때를 향한 경고인 것입니다. O 특별히 이 경고가 에서와 관련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에서는, 창세기 25장에서 장자 상속권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에서에게는, 상속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축복하면 복을 받는 다는 그 언약과, 창l5:18-21절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신 [땅]에 대한 언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서, 이 언약에 대한 상속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O 만약 에서가 이 축복을 받았다면, 그의 후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하나님]이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 [상속권]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값치가 없는 것을 얻기 위해, 기꺼이 값치 있는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죽 한 그릇과 빵 몇 조각을 받고 천년 왕국의 땅을 내여 준 것입니다.


O 그러므로 본문에서 "에서"가 모형이 되는 사람들은, 천년왕국이라는 안식의 땅에 들어가치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유대인들, 다시 말하면, 대 환란 기간 중 구원을 잃어버리는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회개하여 회복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에서도 눈물을 홀리며 후회했지만 그러나 그가 잃어버린 유업은 다시 찾지 못했습니다.(17절). 물론 에서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다른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창27:39-40),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어 그에게 이어져야 했던 그 [땅]에 대한 축복은, 결코 회복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에서"에게 비교한 것은, 대 환란 때 기회를 놓친 유대인들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줄 뿐 만아니라, 구원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상황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영적인 적용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때의 은혜는, 구원받는 은혜가 아니라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인 것입니다.(히4:16).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무가치한 것들로 인해,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무가치한 것들로 인해서,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쁘고 즐거운 삶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0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환란성도들처럼 저주 받아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무가치한 것들로 인해 결국 성령 충만한 삶은 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도 고통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O 왜냐하면,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쓴 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을 오염시키는 [쓴 뿌리]라고 묘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러한 모습이 없도록 항상 돌아보고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열심히 돌아보아 필요한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삶을 살다가 주께서 공중으로 내려오실 때 그것으로 들림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